우리 사회가 언제부터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예전부터 그런 기미는 있었지만 갈수록 정도가 심해지는 것 같아 걱정이다. 적잖은 국민이 좌우 진영(陣營) 논리에 갇혀 사회 현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문제 말이다. 대선 같은 거대 담론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젠 사소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진영 논리가 대입되니 심각하다. 영호남 갈등을 '망국적 지역감정'이라고 하지만, 이젠 좌우의 '망국적 진영논리'가 세상을 뒤덮고 있다.
한 조사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의 6일 기자회견을 보고 응답자의 49.8%가 '불통 이미지가 해소됐다'고 답했다. '반대 목소리를 경청하겠다'는 언급도 없었는데 어떻게 불통 이미지가 해소됐다는 건지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원칙과 법을 존중하는 게 소통이며 적당한 타협은 소통이 아니란 주장만을 반복한다.
무소속 안철수 의원이 3일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한 것을 두고도 논란이 일었다. 정치인이 전직 대통령 묘소를 두루 찾는 게 욕먹을 일인가. 망자에 대한 예를 따져봐도 그런 법은 없다. 민주당 지도부처럼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만 찾는 것이 통합과 거리 먼 속 좁은 행태라고 지적하면 되레 얼굴을 붉히고 나온다.
이뿐만이 아니다. 국정원 댓글 의혹의 해법은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가 답이고, 철도 파업 문제에서는 합리적인 경영정상화를 이루는 게 우선이다. 실상은 어떤가. 우측에선 대선 불복과 불법 파업, 좌측에선 특검 도입과 민영화 반대에만 귀 기울였다. 또 채동욱 전 검찰총장 혼외 아들 의혹, 서해북방한계선(NLL) 대화록, 이석기 의원 종북 문제 등에 대한 대립에서도 대중은 어느 쪽 주장인지를 먼저 살폈고 이를 따라갔다. 주장과 사실이 뒤엉키자 본질은 희석됐고 실체적 판단은 어려워졌다. 이러다 보니 한 유명인이 밥값 문제로 식당 주인과 다툰 일까지 노선 대립으로 조명되는 일도 생겨났다. 사회 한 켠의 귀퉁이에 불과한 사안도 양측의 대립 격화로 인해 나라 전체의 문제로 확대되는 것이다.
이 같은 적대적 대립 양상을 두고 사회가 해법을 찾아가는 과정의 불가피한 충돌로 치부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맞서기만 한다면 한 쪽이 철저히 무너지기 전엔 객관적인 실상을 논할 수 없게 돼 있다. 무익한 승부 구도다. 더 큰 문제는 과거엔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사고를 가졌던 이들마저 대선을 몇 번 치르고 나서는 점차 진영 논리에 빠져들고 있다는 점이다. 한번 되짚어보자. 지난 대선에서 1번을 찍은 유권자 중 최근 각종 사안에서 기호 2번 쪽 논리에 동의한 게 몇 번이나 되는가. 반대로 2번 지지자라면 현정부의 움직임에 진정한 박수를 보낸 적이 있는지 세어보라.
통상적으로 이념적 아군끼리의 만남은 많아도 적군과의 만남은 흔치 않다. 이에 따라 자기 진영의 논리는 강화되고 상대 의견은 점점 불의로 믿게 되는 경향이 짙다. 자신은 객관적ㆍ합리적 판단을 하고 있다는 인식의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이럴수록 건강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세력이 나서줘야 하지만 좌우 강경파의 목소리에 묻혀 실종돼 가고 있다. 침묵의 보신이다. 정의와 원칙은 상대적이고 제한적일 수 있다.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에도 각자 위치에 따라 차이가 발생한다. 하지만 생각과 방향이 다르다고 사회 전체가 양쪽으로 나뉘어 서로를 악(惡)으로 몰아 부친다면 이는 망조다.
물론 정치권이 진영 논리를 부추기거나 이용하는 측면이 있다. 대통령의 불통 문제도 결국은 국민간 소통을 가로막는 요인 중 하나다. 하지만 이들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기엔 사안이 위중하다. 나부터 건강해져야 정치권의 구태도 사라진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지만 건강한 몸통이 중심을 잡아야 힘찬 비행이 가능하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은 몸통은 줄어들고 날개는 커져가는 기형 조류의 모습이 돼 가고 있다. 나는 과연 진영 논리에서 자유로운지, 자각이 필요하다.
염영남 논설위원 libert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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