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삶과 문화/1월 10일] 슬쩍슬쩍 책을 가져다 놓는 사람

입력
2014.01.09 12:02
0 0

전철 안 선반 위에다 다 읽은 책을 두고 내리고 싶지만, 그저 누군가에 의해 분리수거될까 봐 가지고 내리면서 생각한다. 얼마 전 먼 대륙으로 향하는 항공기 안에서의 일이다. 항공기 안에서 책을 다 읽고 난 후, 그 책을 기내에 두고 내리려 하자 내 옆에 있던 한 승객이 나에게 물었다.

"그 책, 필요 없으면 내가 가져가서 볼까요?"

나는 얼른 그분께 책을 드렸다. 먼 곳에서는 우리 말로 된 책이 아쉬울 때가 있다. 단지 사물로서 귀할 때도 있다. 두고 내리면 쓰레기통으로 향할 확률이 높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가져간다면 그것이 인연이 되어 몇 장이라도 읽어볼 확률이, 또 그의 책장에 꽂힐 확률도 높을 것 같아 내심 고마웠다.

한때는 책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 한 권의 책을 쓴 사람이며, 책을 만든 사람을 생각하면 책을 버리는 일은 도무지 패륜한 일 같아서였다. 하지만 책을 어떤 식으로든 정리하지 않으면 몇 년에 한 번씩 해야 하는 이사가, 집을 옮겨가는 일이 아니라 책을 옮겨가는 일이 돼버리곤 해서 책을 단념하기 시작했다. 몇 권의 책을 들고 카페에 가서 읽다가 모두 그곳에 두고 오는 일도, 지인이 운영하는 식당에 몇 달에 한 번씩 책을 부리는 일도 필요했다.

문제랄 것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문제는 며칠에 한 번 꼴로 도착하는 문학잡지였다. 꼼꼼히 보기도 하고 들춰보기도 하는 문학잡지들을 분리수거를 하자니 당연히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작가들의 보석 같은 신작들이 수록돼 있는 것도 그러려니와 그 한 권의 문학잡지들을 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력과 자원이 합쳐져야 하는지를 모르는 바 아니기 때문이다.

마땅한 방법을 궁리하던 끝에 내가 사는 동네의 전철역이 제격이다 싶었다. 동네 전철역 역사에는 시화(詩畵)들도 걸어놓고 책장도 있고 하니 이 아까운 문학잡지들을 그곳으로 시집 보내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물론 눈치가 보이기도 했다. 누군가 모르는 사람이 낯선 책을 꽂아둔다면 책장을 관리하는 사람이 마음에 안 들어 할 수도 있을 것이고, 게다가 그 사람이 그 책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언젠가 내가 책장 앞에 나타나기를 감시하고 있다가 험한 소리를 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럼에도 전철을 타러 가는 길에 잡지들과 책들을 전철 역사의 책장에 꽂는 일을 시작했다. 처음엔 눈치도 봤으나 익숙해지면서 눈치 따윈 보지 않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책장에 포스트 잇 한 장이 붙어 있는 게 보였다. 나는 그 한 장에 쓰여진 굵은 글씨를 차근차근 읽어나갔다. 세상에나.

"슬쩍슬쩍 책을 가져다 놓으시는 분, 고맙습니다. 역장 올림."

나는 놀라 얼굴이 붉어졌다. 아무도 모르게 하는 일이리라 믿으며 하고 있는 일이 하나도 그렇지 않은 일이 되었다는 사실도, 또 누군가 내가 하는 행동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도 뜨끔했다. 어쩌면 역사에 설치된 방범용 카메라에 내 모습이 하나하나 기록되어 있거나, 역에서 일하는 누군가가 그 기록을 일일이 뒤져 내가 책을 가져다 꽂는 모습을 더듬어봤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후끈 목덜미가 더워졌다.

나는 그 일을 아직까지는 계속하고 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내가 이 동네를 떠나기 전까지 그 일은 계속될 것이다. 언젠가 전철역사 책장 앞에 앉아 내가 가져다 놓은 책을 뒤적이는 한 사람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전철역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한낱 짐 끌고 다니듯 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그 전철역 책장 주변에서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책을 읽는 사람들을 더 많이 볼 수 있기를, 누군가 나처럼 책을 가져다 꽂아두기를, 나 같은 사람이 지나다 편하게 책장 앞에 앉아 시 몇 줄을 쓰고 갈 수 있기를, 그리고 그 자리에 마치 기적처럼 책장 하나가 더 들어와 주기를.

그리하여 그곳을 하루에 한두 번쯤 지나게 되더라도 더 이상 그냥 지나치는 곳이 되지 않기를.

이병률 시인ㆍ여행작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