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이라서 이 말을 하고 싶다. '좋게 봐야 좋다.'
나는 군대에서 운전병이었다. 면허도 없이 갔다가 홍천의 야전수송교육대에서 11주 교육을 받았다. 운전은 잘 못했다. 그래서 많이도 맞았다. 하지만 화천의 전방길과 춘천의 구배길에서 접촉사고 한번 없이 살아서 제대했다. 군대에서 각인된 단어는 방어운전. 앞의 앞차를 봐서 나의 실수가 아닌 남의 실수로 일어날 사고를 미리 예견하라는.
시무식 날 '좋게 봐야 좋다'는 말을 하고 고속도로에서 한남대교 쪽으로 거의 진입할 때였다. 나는 1차선을 시속 100km 남짓으로 달리고 있었다. 느닷없이 옆쪽 3차선이 번쩍거린다. '웬 빛?' 하며 슬쩍 보니 갑자기 흰색 승용차가 갈지자로 뒤뚱거리다가 팽그르르 돌았다. 정말 찰라! 3차선에서 2차선을 가로질러 1차선으로 곧장 뛰어들었다. 그 차는 내가 달리던 1차선에서 헤드라이트로 나를 노려보며 정확히 역방향으로 멈췄다. 눈 깜짝할 사이라서 이렇다 할 대책도 없이, '어어?' 만 했다. 급히 핸들을 틀 수도, 뒤에서 오는 차가 걱정이라 급정거도 할 수 없었다. 다행히 차는 중앙분리대 쪽에 바짝 붙어서 일자로 섰다. 나는 그 차를 1초도 안될 만큼의 시간에 가까스로 스쳐 지나갔다. 정말 찰라! 죽음을 직면했다고 느꼈고 나는 기함했다. '아아, 이런 게 기함이구나!' 그랬다. 내 생명을 거저 얻은 환희에 흠뻑 빠져 기진했다.
경이적인 모멘텀.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직접 경험해보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왜 이런 행운을 얻었을까. '좋게 봐야 좋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내린 최종의 결론이다.
'좋게 봐야 좋다'는 것은 안 좋게 보면 좋아질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자명한 이치지만 그런 태도를 견지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물론 쉽지는 않다. 좋게 보이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하지만 이것은 엄연한 불문율이다. 좋게 보지 않으면 인생이 분명히 헝클어진다. 따져보자. 긍정하지 않으면 존재가 불분명해진다. 왜 거기에 내가 있어야 하는가에 답을 할 수가 없다. 애인의 나쁜 점이 보인다면 헤어지는 게 맞다. 아내가, 부모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호적을 정리하는 게 맞고, 군대가 싫다면 탈영을 하는 게 맞다. 우리나라가 싫다면 이민을 가야 한다. 직장 상사가 싫고, 친구가 마음에 안 든다면 우리는 결별해야 한다. '고치면 되지?' 미안하지만 잘 안 고쳐진다. 그대로 받아들여야 심간이 편하다. 극단적인 게 결코 아니다. 부정은 결국 파국을 향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긍정하고 낙관을 하면 천국의 문이 열린다.
'좋게 봐야 좋다'는 것은 좋으면 좋게 볼 수 있다는 말과는 전혀 같지 않다. 예를 들자. 파업이 났다. 노동자는 노동자대로 경영자는 경영자대로 할 말이 많다. 둘은 이해관계라서 한쪽이 이익을 보면 상대는 손해를 보기 마련이다. 그래서 양보하지 않는다. 충돌이 나고 서로를 벤다. 그 때서야 협상을 시작하고 절충한다. 한번 상한 감정은 불신의 불씨를 계속 끌어안은 채 봉합된다. 하지만 좋게 보면 미리 파국을 방지할 수 있다. 서로의 장점만 계속 보이는데 어떻게 다툼이 생기랴. '이상적인 말?' 아니다. 임금인상을 요구하기 전에 임금을 먼저 올려줄 수 있고 노동생산성을 말하기 전에 노동의 품질이 스스로 좋아질 수 있다. 네가 잘하면 나도 잘해줄 수 있다는 것은 하나 마나 한 말이다. 내가 잘하면 끝이다. 기대할 것도 상처받을 일도 다 없다. '이상적인 말?' 아니다. 상대가 불편하고 괜히 손해를 보는 기분이 들면 관계를 끊고 떠나면 그뿐이다.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긍정을 할 의무 밖에 없다. 그리고 긍정하는 순간 천하를 얻는다. 나는 흰색 승용차에게 무한히 감사하며 한남대교를 탔다. 좋게 보면 좋아진다. 올해는 낙관이 나의 화두다. 좋지 아니한가.
고선웅 경기도립극단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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