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타도서 종파분쟁으로 변질… 이집트에선 군부가 재등장이슬람 정치세력 향방 불확실6월 이후 이란핵 포괄적 협상 "극단적 선택 대신 점진적 전진"시리아 내전·이라크 테러… 미국, 중동 안정화 묘수는 없어
3년여 전 튀니지의 작은 마을, 스물여섯 살 청년의 죽음으로 촉발된 후 무서운 속도로 진행되던 '아랍의 봄'은 지난 한 해 숨고르기 국면이었다. 정치변동이 시작되고 이어지던 2011년과 2012년은 아랍 대중들에게 충격적인 해였다.
그 동안 민주주의와 아랍은 양립할 수 없다는 통설이 널리 퍼졌던 바, 순식간에 벌어진 권위주의 정권의 연이은 붕괴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사실상 중동에서는 권위주의 정권 말고는 제대로 국가 권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일종의 예외주의 정서가 팽배했었다. 냉전의 강고한 진영론이 붕괴되며 중앙아시아와 동구권이 민주화 되는 순간에도 중동의 권위주의는 끄떡없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9ㆍ11을 겪고 난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2004년 소위 '확대중동구상' (the Greater Middle East Initiativeㆍ일명 중동민주화 구상)을 통해 '정권교체' 또는 '정권변환'을 운위하며 아랍의 민주화를 시도했으나 실패로 귀결되었을 정도였다.
기로에 선 아랍의 봄
하지만 냉전해체라는 거대한 판의 변동에도, 초강대국 미국의 민주화 프로젝트의 칼날 앞에서도 독재를 유지하던 튀니지, 이집트, 예멘 그리고 리비아의 권위주의 정부는 아랍의 봄을 타고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정치변동의 파도가 시리아 및 걸프의 소왕국 바레인으로 퍼져나가면서 많은 이들은 이 흐름이 곧 걸프와 이란에까지 이를 것이라 조심스레 예견했었다.
아랍의 왕정은 불안에 떨기 시작했고 곧바로 국가 개혁 프로젝트 국면에 들어갔다. 축적된 막대한 오일달러를 이용, 사회 인프라를 구축하기 시작했고 국민들의 정치적 의사표현도 조금씩 확대시켰다. 2012년만 해도 누구나 다 아랍 전역에 민주화의 물결이 확산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2014년초 현재, 아랍의 정치변동은 변곡점에 이르렀다. 기로에 선 것이다. 첫째, 독재타도의 단순한 구도에서 이제 종파분쟁의 구도로 변화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확산되던 권위주의 정권의 퇴진은 시리아에서 막혔다. 3년째 계속되는 시리아 내전은 이제 집권 알라위파와 반군 다수 종파인 수니파간의 분쟁 양상을 띠면서 좀처럼 해결되기 어려운 고질적인 사회분쟁으로 바뀌어버렸다. 수니와 시아파간 대결의 양상이 심화되면서 인근 수니아랍국과 시아파 이란의 개입현상이 나타났다. 여기에 러시아의 아사드 지지 입장에도 변화가 없다. 이는 역내 오랜 갈등의 역학관계가 시리아 내부로 얽혀 들어오면서 시민의 힘으로 바샤르 알 아사드 정부를 무너뜨릴 가능성은 희박해졌음을 의미한다.
둘째, 이집트에서 무슬림 형제단 출신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이 엘시시 국방장관에 의해 축출되면서 아랍 정치변동은 군부의 재등장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그 동안 추풍낙엽처럼 무너지던 아랍 권위주의가 시리아에서 숨고르기를 하는 동안 기존의 구체제가 전열을 정비, 다시 전면에 나설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올해 이집트에서 군부가 권력을 다시 공고히 하게 되면 아랍 정치변동의 동력은 급격히 저하될 가능성이 커진다.
셋째, 이슬람 정치세력의 향방이 불확실해졌다. 아랍 정치변동이 시작된 직후, 정권교체를 겪은 국가들을 살펴보면 오랫동안 집권했던 권위주의 정부가 무너진 공백을 메울 정치세력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사실상 야당세력은 정권의 탄압으로 인해 거의 존재감이 없었고, 시민사회의 역량도 미흡했다. 이 과정에서 모스크를 중심으로 광범위한 사회연계망을 가지고 있는 이슬람 세력이 정당을 조직하여 정권투쟁에 뛰어들게 되었다. 급조된 야당세력이나 일부 진보, 세속주의자들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대중적 지지를 획득한 이슬람 정치세력의 대표적인 예가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과 튀니지의 이슬람 정당 엔나흐다 등이다.
그러나 무슬림 형제단 출신 이집트 대통령 무함마드 무르시가 축출되는 과정에서 이슬람 정당의 무능, 독선 등이 노정되며 국민들의 신망을 대거 상실했다. 그리고 이슬람 세력에 대한 기대와 지지 수준이 급락했다. 이는 향후 아랍 내부의 권력경쟁 과정에서 이슬람 세력의 집권 가능성이 불투명해졌음을 의미한다.
이란 핵협상의 조심스런 진전
한동안 중동 전역을 강타하며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아랍 정치변동이 일정부분 소강상태로 전환됨에 따라 만성화될 가능성이 커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올해 중동에서 가장 주목 받는 현안은 결국 이란 핵협상으로 귀결된다.
지난해 11월 24일 제네바에서 합의된 P5+1(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및 독일)과 이란간의 핵 문제 초기단계 협상 타결은 역사적인 怜퓽潔駭?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 이후 처음으로 미국-이란간 고위급 협상이 이루어졌다는 점과, 2002년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이란 핵문제와 관련, 최초로 국제사회와 이란이 구체적인 합의를 문건화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만일 초기단계 이행조치가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2014년 6월 이후 포괄적 협상이 시작된다. 이 협상이 결실을 맺을 경우, 중동내 정치질서는 일대 격변이 일어나게 된다.
현재로서는 협상의 추이를 쉽게 예단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오바마 대통령이나 이란의 로하니 대통령의 경우 현재로서는 양국 모두 국내사정상 이 협상을 깨고 원상태로 복귀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협상의 동력을 유지해 나가려 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란 핵협상은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극단적 파국을 피해가면서 진행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을 것으로 판단된다.
미국의 대중동정책과 2014년 중동
오바마 행정부의 중동정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비폭력적 다원주의'로 정의할 수 있다. 기존 부시 행정부의 민주화 구상을 포기하고, 비록 권위주의 정권이거나 이슬람 신정주의라도 폭력적이지만 않으면 언제든 우호관계를 유지하겠다는 구상이었다. 중동에서는 어떤 형태로 개입하더라도 실패한다는 것을 경험한 미국은 몇 가지 비폭력의 조건, 즉 대량파괴무기의 부재 및 테러리스트와의 연계 단절을 전제로 협력관계를 강화하겠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이를 바탕으로 골칫거리인 중동에서 벗어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아시아 재균형'을 천명하고 대외정책의 무게중심을 중동에서 아시아로 옮기려는 미국은 최근 중동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로 인해 어정쩡한 입장을 취해왔다. 미국 내에서도 현안이 산적한 중동을 버리고 중국 견제에 전력투구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전략인가에 관한 의문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는 명시적으로 아시아 태평양에서 존재감을 더욱 높일 것임을 거듭 선언했고, 실제로 그 방향으로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이라크에서 폭탄 테러가 빈발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안정화가 쉽지 않아 결국 탈레반과 협상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다. 사상 초유로 자국 대사가 리비아에서 피살당하는 등 도저히 미국이 발을 뺄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더욱이 시리아 혼란이 지속되고, 아랍 정치변동이 중동 내부를 강타해 정치지형이 상당 부분 변한 상황에서 미국은 사실상 중동을 그대로는 놓아둘 수 없는 형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사실상 미국이 중동 안정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있는 것도 아니다. 시리아 문제도, 이집트 정변도 그리고 고질적인 이란 위협도 어느 것 하나 쉬운 사안이 없던 터였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이란과 핵협상이라는 카드를 내밀었다. 실제로 이란과의 관계만 정상화시킬 수 있다면 시리아를 비롯한 역내 종파분쟁의 구도를 상당부분 희석시킬 수 있다. 이라크의 불안정과 아프간 철군 부담도 상당 부분 줄어든다. 그렇기에 미국은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고 이란과의 대면 협상에 나선 것이다. 아랍 스프링(Arab Springㆍ튀지니 이후 아랍의 연쇄 민주화 바람)이 불확실한 만성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면 어쩌면 이란 핵문제에서 생각지도 못한 돌파구가 마련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조심스런 기대가 여기저기서 나오는 이유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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