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최장기 기록을 경신하며 내달리던 철도파업 기관차가 22일째 멈춰 섰다. 여야가 합심해 밤샘 협상을 벌여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에 철도산업발전소위원회를 구성하는 조건으로 노조의 파업 철회를 끌어냈다. 경향신문은 이 소식을 전하는 31일자 1면 머리기사 제목을 '이것이 정치다'라고 뽑았다. '법과 원칙'을 내세운 초강경 대응보다 대화와 타협의 힘이 세다는 걸, 정치란 본디 이래야 한다는 걸 함축적으로 보여준 타이틀이다.
그러나 진짜 정치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파업은 멈췄지만 파업을 부른 불씨는 여전히 타고 있다. 세밑에 모처럼 힘을 발휘한 정치가 파업만 끝낸 깜짝쇼에 그치지 않고 철도 개혁을 둘러싼 숱한 난제들을 속 시원히 풀어낼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 우려가 앞선다.
31일 열린 철도산업발전소위 첫 회의에서 여야는 기존 입장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한 공방만 주고 받았다. 무릇 협상이란 서로의 견해 차를 확인하는 데서 시작하는 법이라지만, 해가 바뀐 뒤에도 소위에서 다룰 의제를 놓고 지루한 다툼이 이어질 공산이 커 보인다.
사실 이런 상황은 전날부터 예견됐다. 여아는 합의안에 사인한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동상이몽을 드러냈다. 박기춘 민주당 사무총장은 "소위에서 철도 민영화 문제도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은 "민영화는 정부가 안 한다고 하지 않았나. 민영화 금지 법안 논의는 안 한다"고 선을 그었다. 정작 장기파업 사태를 부른 핵심 사안을 아예 논의조차 하지 않겠다는 여당의 태도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소위의 간판으로 내건 '철도산업발전'은 말 그대로 간판에 불과했다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파업 초기부터 대화를 끊고 직위해제와 징계, 대규모 경찰력을 동원한 체포작전 등 강공책으로 일관한 정부와 코레일은 여전히 '법과 원칙에 따른 대응'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다. 일각의 비유처럼 파업이 '폭주기관차'였다면, 이들의 대응은 그 열차에 올라 기관사들을 설득하고 폭주를 멈추게 할 방안을 고민하기는커녕 "저건 폭주다, 이러면 다 죽는다"고 외쳐대기만 하거나 또 다른 폭주기관차를 투입해 마주 보고 달리게 한 꼴이다. 그런 정부가 노조의 업무복귀 첫날 내놓은 수습책이라곤 코레일이 독점해온 KTX 기관사 교육훈련에도 경쟁을 도입해 '고임금 철밥통'을 깨겠다는 것이란다. 한숨만 나온다.
도로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국회 논의나 노ㆍ사ㆍ정 대립보다 더 답답하고 우려스러운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사태 인식이다. 김무성 의원은 30일 막후 협상 과정에서 청와대와도 협의했음을 내비쳤지만, 박 대통령이 쏟아내는 말들에선 대화와 타협의 의지를 전혀 읽을 수 없었다. 그는 이날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SNS(소설네트워크서비스) 등을 통해 퍼져 나가는 잘못된 유언비어를 바로잡지 않으면 개혁의 근본 취지는 어디로 가버리고 국민 혼란만 가중될 것"이라고 말했다. 철도, 의료, 가스 등 공공서비스를 민영화하려는 것 아니냐는 적잖은 국민들의 우려를 단칼에 '유언비어'로 규정한 것이다.
물론 SNS 등에는 민영화 문제와 관련해 '괴담'이라 할 만한 황당한 주장들도 떠돈다. 하지만 그런 괴담들이 기생하는 숙주는 그 효과를 납득하기 어려운 어설픈 정책을 충분한 논의도, 설득 과정도 없이 일방적으로 밀어 붙여 온 정부의 독불장군식 태도다.
박 대통령이 이날 들고 나온 '일류 국민-일류 국가'론도 뜬금없다. 공공의 이익과 사회 기본적 질서를 강조한 것은 언뜻 들으면 도덕 교과서 같은 얘기지만, 국민을 경청과 설득의 대상이 아닌 훈계와 평가의 대상으로 보는 듯해 못내 불편하다.
박 대통령은 "일류와 일등은 비슷해 보여도 엄연히 다르다. 일등은 남을 이겨 순위에서 최고가 되는 것이지만 일류는 최고의 품격과 질을 갖추는 것"이라고도 했다. 좋은 말이다. 그런데 '자랑스런 불통'을 외치는 청와대와 정부가 먼저 새겨야 할 말이 아닐까. 일류 국민, 일류 국가를 바란다면 스스로 일류 정치를 보여줘야 한다. 새해에는 '법과 원칙'으로 포장한 일방통행을 멈추고, 제발 정치를 하라. 일류 정치의 품격과 질을 보여달라.
이희정 사회부장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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