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기' 조선전에 첫 등장한나라와 대결하던 위만조선 5000필로 평화 협상 꾀해'삼국지' 위지동인전엔 '부여에서 명마 난다고 기록● 건국신화 단골신라 박혁거세 나온 붉은알에 백마가 무릎 꿇고 앉은 채 절해고구려 주몽, 부여 어린시절 왕의 준마 굶겨 제 것 만들어● 교통수단의 뒤안길로1965년 서소문 고가 생기며 마차 통행금지, 길에서 사라져● 말띠 여자는 팔자 드세다?남편 기세 꺾는다는 일본 속신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퍼진 말
말은 십이지의 일곱번째 동물이다. 육십갑자를 따라 갑오(甲午) 병오(丙午) 무오(戊午) 경오(庚午) 임오(壬午)의 순으로 말의 해가 돌아온다. 시각으로는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 방향으로는 정남, 달로는 음력 5월에 해당한다.
2014년은 갑오년, 푸른 말의 해다. 십간 중 갑이 동서남북중 5방 가운데 푸른 색에 해당해 그리 부를 수 있다. 굳이 푸른 말이어서 좋다 나쁘다 할 근거는 없다. 말띠 여자는 팔자가 세다는 속설이 있긴 하나 이는 일제강점기에 퍼진 말이다. 일본에서는 말의 해에 태어난 사람은 기질이 세서 말띠 여자가 시집을 가면 남편을 깔고 앉아 기세를 꺾기 때문에 안 좋다는 속신이 있다.
말은 고대로부터 인간과 함께해 온 만큼 한국인과도 친숙하다. 전쟁터를 달리는 군마로, 짐을 나르는 일꾼으로 그리고 탈 것으로 두루 썼고 가죽이며 말총 등으로 신발과 갓 등의 생활용품을 만들어 썼으니 낯설지 않다. 20세기 초반에 자동차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마차가 다녔지만 교통수단으로서 말은 더 이상 매력이 없다.
한국의 도로에서 말이 끄는 마차를 볼 수 없게 된 것은 1965년 서울에서 가장 번잡하던 서소문동에 고가도로가 생기면서부터다. 이를 시작으로 도로에서 마차 통행이 금지됐다. 한국전쟁 때만 해도 달랐다. 말은 전후 부서진 전찻길을 복구하는 공사장을 오가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마차로 레일을 실어 날랐다. 1960년대 초만 해도 서울역 뒤에 우마조합이 있어 조랑말 150여 마리를 부렸다.
교통 수단, 운송 수단으로서 말은 그렇게 멀어져 갔다. 하지만 말에 대한 오랜 향수마저 사라진 건 아니다. 한국 고유 모델 자동차 1호로 1976년 등장한 포니는 작고 귀여운 말을 가리킨다. 그 후 갤로퍼(질주하는 말)를 거쳐 에쿠스(말의 학명 중 하나)까지, 자동차 시대에 따른 철마가 도로를 달린다. 외국 자동차 페라리도 앞 발을 든 말이 그 상징이다.
말이 이렇게 우리 곁에 여전히 머무는 것은, 인간과 맺은 인연이 그만큼 깊고 오래됐기 때문이다. 한국의 역사에서 말이 나오는 장면들과, 오늘날 민속에도 남아 있는 말의 상징들이 이를 보여준다.
우리 조상은 말을 타는 민족이었다. 기원전 중국의 사서에서부터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있다. 한반도의 말 이야기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의 조선전에 나온다. 한나라와 대결하고 있던 위만조선이 말 오천 필로 협상을 꾀했다고 하니 이미 그때 말을 많이 키웠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위지 동이전은 부여에서 명마가 난다는 기록과 함께 부여에서는 시기가 심한 여자를 죽여 시체를 산 위에 썩게 내버려 두는데 여자 집에서 시신을 찾아가려면 소나 말을 보내야 한다고 전하고 있다. 동이전 예조를 보면 고구려 말은 몸집이 작아 산에 오르기 편하다고 나온다. 고구려의 작은 말은 재래종 과하마를 가리킨다.
고고 유물에서 말은 여러 형태, 여러 상징으로 나타난다. 말 모양 고리 장식이 달린 청동 허리띠, 말 모양으로 빚은 신라와 가야의 토기, 신라 고분 천마총에서 나온 구름 위를 날아가는 흰 말,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말 타고 활을 쏘며 사냥하는 씩씩한 사나이들…
무덤 속 말은 죽은 이를 태우고 저승 좋은 곳으로 훨훨 날아간다. 영혼을 천상으로 인도하는 말의 상징은 조선 시대에 오면 죽안마(竹鞍馬)로 이어진다. 죽안마는 왕이나 왕비의 장례식에 쓰던 인조 말이다. 다리는 나무, 몸통은 대나무로 만들고 눈과 갈기, 꼬리, 안장까지 갖췄다. 조선 말 고종 황제의 인산 때 장례 행렬에는 죽안마 네 필이 두 바퀴 수레를 타고 따라갔다.
신라 건국 신화에도 말이 나온다. 박혁거세의 탄생을 알린 것은 흰 말이다. 상서로운 빛이 서린 땅에 흰 말이 꿇어 앉은 채 절을 하고 있어 살펴 보니 붉은 알이 있는데 그 알에서 나온 이가 혁거세다.
영웅은 준마를 거느리는 법.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이 나라를 세우기 전 부여에 있을 때 왕의 준마를 일부러 굶겨 비루먹게 해서 제 것으로 만든 일은 그의 지략을 보여 주는 에피소드다. 말과 영웅의 우정을 웅변하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 중에 아기장수 설화가 있다. 아기장수는 세상을 구할 영웅이지만, 자신의 초인적인 능력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 죽음을 당하는 운명이다. 그가 죽을 때면 신비로운 백마가 나타나 함께 죽는다. 영웅과 백마는 죽어도 죽지 않고 천상으로 날아가 새 세상을 열 것이다.
아기장수와 함께하는 백마의 상징을 가장 웅혼하게 노래한 이는 일제강점기 시인 이육사다. 시 '광야'가 그 노래다. "까마득한 날에 / 하늘이 처음 열리고 /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 모든 산맥들이 /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 차마 이 곳을 범하진 못하였으리라 /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 지금 눈 내리고 /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언젠가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힘든 세월을 견디게 하는 영웅이다. 하수상한 시절마다 우리는 그를 기다린다.
오미환선임기자 mho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