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의 표현과 문화적 맥락에 대해 공부하고 가르치는 국어 선생의 한 사람으로서, 유행어나 신조어 때문에 난감할 때가 있다. 특히 언론이나 정치권이 이데올로기적인 목적 때문에, 지시하는 사상(事象)과 표현이 '사맛디' 않거나 완전히 반대이기까지 한 말을 만들고 유포하는 일을 보면 당혹스럽다.
근래 가장 이해하기 힘든 유행 신조어는 '귀족노조'이다. 이 말이 가진 맥락과 화용론을 살피니 말 자체에 우리 사회의 모순이 잠겨있는 것 같다. 파업에 나선 철도노조와 민주노총을 비난하고 공격하기 위해 쓰이는 단어가 '귀족노조'다. 왜 '노조' 앞에 '귀족' 같은 단어가 붙었을까.
'귀족' 하면 나는 같은 영화가 떠오른다. 귀족은 봉건제 하의 특권 신분으로서 인구의 극소수이다. 그들은 임금님이나 황제 주변에서 알랑거리며, 영지와 작위를 갖고 대개 평생 전혀 노동하지 않는 삶을 영위했다. 대신 '천것'으로 태어난 빈농ㆍ농노와 마름들이 고상하고 우아한 그들을 위해 평생 뼈 빠지게 노동한다.
그래서 진정 궁금하다. 정말 현대나 이번에 파업에 나선 철도노조 같은 대기업 노조의 노동자가 귀족처럼 사는가. 그들이 작위나 몇억쯤 되는 자산을 가졌는가. 도대체 어느 나라 '귀족'이 공고 나와서 주당 50~60시간씩 온몸에 기름칠하고 콘베이어 벨트를 타고, 그러다 과로사하고 그러는가. 노조 간부들이 단체로 골프채 매고 다니고 룸살롱에 다니거나 미술작품을 수집하고 그러는가. 물론 '귀족'은 일종의 비유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도, 문학적이지도 않은 최하급의 비유이다.
철도 노동자들이 욕먹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 평균 연봉이 6,000만 원에 이르기 때문이라 한다. 6,000만 원 받으면 파업하면 안 되고 부당한 일이 있어도 '국으로' 참고 있어야 하는가. 설사 그들 '귀족' 노동자가 한국 노동자 중에서는 상급의 월급을 받는다 하더라도, 화용론적 상황을 보건대 이 말은 타기되어야 한다. 악의적인 말의 주체들은 '귀족노조'라는 말로 민노총과 소속된 다른 노조 전체를 공격하려 한다.
결국 '귀족노조'라는 말은 한국의 대다수 노동자가 당하는 말도 안 되는 착취를 감춰버리고, 노자 간의 모순을 노노 사이의 대립으로 슬쩍 바꿔놓는 전가의 보도이다. 하루 10시간씩 일해도 100만~200만원 밖에 못 버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그 반대편에는 연봉 10 몇 억씩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과, 그에 대한 분노를 엉뚱한 데다 풀게 하는 데 '귀족노조' 같은 말의 쓰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이 유행어처럼 된 데에는 '노동'과 노동자 권리에 대한 우리 사회의 적대와 천대 풍조가 있다. 저 노동조합 아저씨들이 해고와 구속을 무릅쓰고 자칫하면 자기 가족의 안위 자체와 미래를 완전히 망칠지 모르는 파업 같은 위험한 행위를 왜 하게 되는지, 노동법ㆍ업무방해죄ㆍ손배소 제도란 게 얼마나 악랄하고 잘못된 것인지, 운동에 나선 사람들이 어떤 불의에 맞서 희생을 감내하며 춥고 배고픈 날을 감당하는 약자들인지, 때로는 얄밉지만 그래도 민노총을 지키는 게 일하는 사람 전체의 인권과 복지를 지키는 일과 관계 깊은 일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가 없다.
그런데 대개 '귀족노조'를 공격하는 선봉에 선 분 중에는 연봉 1억이 훌쩍 넘는 직업을 가진 분들이 많다. 예컨대 보수 신문이나 공중파 방송의 기자들 평균 연봉이 얼마일까. 초임만 4,000만~5,000만원에 이른다 들었다. 그런 데 동조하는 어떤 사람들은, 노동자들이 학교 다닐 때 공부를 못해 '노동'이나 하는 주제에 그만한 월급을 받는 일이 밉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참으로 권위적이고 반민주적인 태도이다. 왜 어떤 이들은 공부를 못하고, 어떤 이들은 왜 공부를 잘하게 됐을까. 이제 한국에서 공부 잘한다는 것은, 솔직히 제 능력보다는 '할아버지의 재력'이나 '어머니의 정보력' 덕분 아닌가. 처음부터 다른 출발선이 공부능력과 '신분'을 결정한다.
요컨대 '귀족노조'라는 말에 반대한다. 당장 이런 언어를 우리 인식과 공론장에서 지워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