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2013년을 시작할 땐 정말 희망과 기대에 부풀었다. 우리 사회를 양분하는 이념 갈등의 깊은 골을 메우고 그 위에 생산적인 공론의 장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밝아 보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제까지 좌파적 이념과 정책으로 여겨졌던 복지와 경제 민주화를 적극적으로 끌어안음으로써 아버지의 이름에 항상 따라다니는 독재자라는 꼬리표를 끊어내고 한국 현대사의 한 장을 아름답게 갈무리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대선결과는 51 대 49로 절묘하게 양분되었지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가 이런 희망과 기대에서는 찬반을 뛰어넘어 한마음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 깊게 파인 이념의 골은 너무나 깊어서 작은 문제조차도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사회적 갈등으로 비화하지 않는가. 이 응어리를 풀지 않고서는 진정한 사회적 통합을 이룰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에 우리는 '국민 대통합'을 약속한 박 대통령에게 남다른 기대를 걸었다.
희망이 너무 크면 절망도 그만큼 더 깊다고 하였던가. 국민과의 소통을 통해 우리의 이념 갈등을 극복하고 새로운 행복사회를 건설할 것이라는 기대는 거품처럼 꺼져버렸다. 박 대통령이 "원칙 없이 적당히 타협하고 넘어가지는 않겠다"고 또박또박 선언하면,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은 "원칙을 지키는 불통은 자랑스러운 불통"이라고 추임새를 넣는다. 이를 보면 소통과 통합은 이제 물 건너간 것처럼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이 정말 사회 통합보다는 발전을, 그리고 소통보다는 원칙을 선택하였다면 우리 사회의 앞날이 적잖이 걱정된다. 박 대통령이 무엇을 원칙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소통'과 '타협'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두 인정할 수 있는 원칙은 두말할 나위 없이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정신뿐이다. 이 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밖에 없고, 그 실현방법도 정권과 정당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다양한 정치 이념과 이해관계를 가진 국민, 사회단체, 정당들 사이에서 정치를 하려면 타협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타협 없는 원칙은 본래 원칙이 아니다. 그것은 독선이고 독재일 뿐이다.
민주주의에서 타협은 소통을 통해 합의점을 찾는 방식을 가리킨다. 이 개념을 발전시킨 로마 시대의 키케로에 의하면 타협은 갈등하는 당파들이 제 3자의 중재와 판단에 따른다고 공동으로 약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제 3자는 국민이다. 국민의 뜻을 따르겠다는 '공동 약속'(com-promise)이 바로 '타협'(compromise)이다. 여당은 여당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끊임없이 국민과 소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이해하고 있는 국민의 뜻을 가지고 경쟁해야 한다. 어느 정당과 정권도 국민의 뜻을 독점할 수 없다면 그들이 타협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박근혜 대통령은 왜 그렇게 '원칙'을 강조하는 것일까.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불법 파업에 대해선 어떤 관용도 없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법치주의'의 정착을 위해서 원칙을 고수하는 것처럼 보인다. 박 대통령은 영국병을 치유해 새로운 도약을 이룩한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처럼 대한민국의 중병을 고쳐놓기 위해서 원칙주의자가 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국민 대통합'을 가로막는 배타적 이념 갈등과 소통 부재만큼 고질적인 한국병이 또 어디 있겠는가.
소통의 단절로 그 깊은 속내를 파악하기 힘드니 무엇을 위한 원칙인지 점점 불투명해진다. 지향하는 정치적 노선이 뿌옇게 흐려질수록 박 대통령의 타협하지 않는 강골 이미지만 더욱 선명해진다. 이러한 '원칙' 고수의 이미지가 대통령 당선에 많은 기여를 하였는지 아니면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수용한 '타협'의 이미지가 더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는 여전히 미지수이다. 만약 두 가지 모두가 성공의 요인이라면, 원칙과 타협을 균형 있게 조화시킬 때에만 정치적 성공이 지속 가능하지 않을까. 새해에는 정말 성공한 대통령을 보고 싶다.
이진우 포스텍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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