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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12월 27일] 돌아가는 길이 가장 빠른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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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12월 27일] 돌아가는 길이 가장 빠른 길

입력
2013.12.26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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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현대문명의 이기(利器)들이 우리 생활을 윤택하고 편리하게는 만들었지만, 그만큼 우리를 바보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노래방기계가 나온 뒤로는 이제 가사가 모니터에 흐르지 않으면 어떤 노래도 부를 수 없다. 대학 시절 친구들과 여행 가서 통기타 반주로만 3~4시간 끊이지 않고 대중가요를 불러댔는데 이젠 좋아하는 노래도 가사를 외우지 못한다.

어쩌다가 휴대폰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정말 낭패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전화번호가 많아야 서너 개가 안 된다는 사실에 절망하게 된다. 예전엔 집 전화번호는 물론 가까운 친지나 친구는 말할 것 없이 동네 중국집 전화번호까지 수십 개의 전화번호를 당연히 외우곤 했는데 이젠 집 전화번호와 집사람 그리고 사무실 전화번호 정도만 기억할 뿐 매일 만나고 매일 대화하는 사업 동반자들의 전화번호조차 외우지 못한다.

내비게이션은 또 어떤가. 이젠 두서너 번 간 곳도 내비게이션 없이는 다시 찾아갈 수 없다. 예전엔 물어물어 어렵게 찾아가게 된 길은 어떤 경우에도 잊어버리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저 내비게이션만 따라가다 보니 도대체 내가 어떤 경로로 어떻게 가는지는 전혀 내 의식 속에 기억되지 못한다.

서두가 길었다. 문명의 이기가 결국 우리를 멍청하게 만들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자 함은 아니다. 내비게이션이 처음 나왔을 때 이는 실로 혁명이었다. 담뱃갑만 한 기계에 전국지도가 다 들어 있고 초행길이든 아니면 인적이 드문 산골이라도 이젠 전혀 걱정이 없다.

얼마 전 동문 모임이 있었다. 20대 초반의 후배부터 60대 후반의 대선배님들까지 동문이라는 공통점 하나로 술잔을 기울였다. 술잔이 몇 순배 돌자 30대 중반의 후배가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지방에서 수재소리 들으며 나름으로 촉망받는 사람이었는데 서울에서 대학 졸업하고 사회에 나온 지도 이제 십 년쯤 됐는데도 아직 결혼은 물론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직장도 갖지 못했고 그렇다고 돈을 모으지도 못했다며 자신은 패배자가 된 것 같은 자괴감에 하루하루가 괴롭다며 눈물을 보였다.

그 후배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던 50대 후반의 선배님이 그 후배에게 소주를 따라 주며 말씀하시기 시작했다."사랑하는 후배여… 자네 내비게이션 알지? 예전의 내비게이션은 최단거리만 안내해줬지. 근데 요즘 내비게이션은 어떤가. 이젠 최단거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교통상황을 판단해서 정체되는 길인지 아닌지 도로가 공사 중인지 아닌지까지도 고려해 최적의 경로를 안내해주지 않는가. 자네가 지금 가는 길이 돌아가고 더디 가는 것 같지만 어쩌면 그 길이 목적지에 가장 빠르게 가는 길일지도 모르네."

선배의 말씀을 듣던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숙연해졌다. 물론 그 선배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을 수도 있지만, 그냥 값싼 위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최단경로로 달려가던 친구들이 과연 현재도 행복할까. 아니면 멍청하게 돌아가고 더디 간다고 여겼던 친구들이 어느새 자기분야에서 확고히 자리 잡고 사회생활을 하는지는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솔직히 말해 나 역시 영화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본 게 내 나이 40이 넘어서다. 그전까지 아버지에게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박찬욱 감독은 데뷔작과 두 번째 작품 모두 처참하게 흥행에 실패했고, 봉준호 감독의 데뷔작은 관객이 6만 명도 안 됐다. 지금은 초특급배우가 되었지만, 류승룡도 40이 넘어서야 밥벌이가 되었고 송강호, 김윤석 등 모두가 최단경로를 달려온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지금 조금 더디 가는 것 같고 돌아가는 것 같아서 괴로운 후배들에게 그 선배의 충고를 꼭 전해주고 싶다,

"돌아가는 길이 결국은 제일 빠른 길인지도 모른다."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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