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답지 않게 탁한 공기로 시야가 짧다. 지상 500피트. 3시 방향으로 건설 중인 신도시의 스카이라인이 뿌옇게 눈에 들어왔다. 반대 9시 방향은 말라붙어버려 논밭과 구분이 어려운 염전이다. 그리고 12시 방향, 캐노피의 굴곡을 통해 찌그러져 보이는 타원의 태양이 바다로 눕고 있었다. 태양은 뻘에 박혀 사는 갯것마냥 묵직히 두터운 연무에 파묻혀 있다. 오후 5시. 과연 할 수 있을까 싶은데, 그래도 금빛 노을을 서쪽 하늘에 풀어놓기 시작했다. 100마력짜리 엔진이 끄는 조그만 비행기 조종석으로 누런 하늘빛이 스며들었다. 감격이라기엔 조금 여윈 어떤 감흥이 일어났다 가라앉았다. 호수로 가는 새들의 날갯짓이 분주했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동짓날을 하루 앞둔 지난 토요일. 조금 더 멋진 낙조를 궁리하다가 떠올린 곳이 화성, 아니 화성의 하늘이었다. 이곳엔 해넘이의 풍경을 맞이하는 무척 매력적인 방법이 하나 있다. 그 얘기는 뒷부분에 하는 것이 좋겠다.
벽해상전(碧海桑田)이다. 화성의 해안은 바다였다가 육지로 변모 중인 곳이다. 누만 년에 걸쳐서 일어나야 할 변화가 단 수십 년 만에 진행되고 있다. 그래서 그 모습이 무척 생경하다. 분명 이국적이라 해야 할 풍광이지만 막 큰 수술을 끝낸 환자의 병실 같은 분위기가 너른 대지를 채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행자의 발걸음보다는 덤프트럭을 더 자주 마주치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송산그린시티라는 이름의 신도시가 이곳에 건설 중이다. 간척지를 지칭하는 이름은 자주 바뀌지만 간척으로 생긴 호수를 부르는 이름은 하나다. 시화호. 경기도 시흥시 오이도부터 화성시 서신면까지 바다를 이어 붙여 만든 인공 호수다.
끝없이 펼쳐져 있을 것 같은 갯벌의 끝에 방조제가 완성된 건 1994년이다. 이후 갯벌의 상당부분은 더는 밀물과 썰물에 쓸리지 않는 뭍이 됐다. 본래 콘크리트 벽으로 바다를 가둔 것은 담수호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곧 그 시도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깨닫고 해수 유통을 재개했다. 그래서 인공 구조물 안쪽에 다시 바다가 있고, 그 언저리에 바다였던 땅이 있는 낯선 모습이 여기에 있게 됐다. 생태파괴에 대한 절규와 농지확보라는 명분은 이제 모두 흐릿하다. 그래서 옳고 그름의 논리를 기억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다만 그 결과로 만들어진 낯선 풍경에 대해 얘기하려 한다.
뽕나무 상(桑)자로 포도를 대신해도 된다면 문자 그대로 벽해상전이다. 지금 맛 좋은 포도가 나는 송산면의 밭은 상당 부분 바다였다. 이 바다는 천일염을 생산하던 소금밭이기도 했다. 한동안 우리나라 전체 소금 소비량의 3분의 1을 생산하던 남양소금 주식회사가 여기 있었다. 1992년 염전은 문을 닫았다. 염부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일부는 이곳에 남았다. 그들이 포도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제 몸뚱이의 뼈와 근육으로 상전벽해, 아니 벽해상전을 현현해낸 것은 아마도 화성의 염부(농부)들이 유일할 것이다. 그 사정을 알고 나면 송산 포도의 알갱이에 맺히는 하얀 효모 가루가 혹 소금은 아닐까, 실없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포도밭 지역을 지나 시화호에 바투 붙은 대지가 목적지라고 할 수 있겠다. 드넓은 갯벌을 바닷물 밖으로 건져낸 지 20년. 아직 염분이 빠지지 않은 대지엔 갈대와 함초밖에 없다. 독한 생명력의 버드나무도 몇 그루, 드문드문 뿌리를 내리고 있다. 광활하게 수평으로 뻗은 대지가 그러한 모습인 건 한국땅의 지형과는 본래 거리가 먼 것이다. 그래서 사진 찍기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남회귀선 아래 어디쯤 있을 법한 아프리카 초원의 풍경, 그것이 본래 리아스식 해안이던 이곳에 있다. 20여년 전까지 가난한 어촌 섬마을이던 어섬과 형도, 우음도 등이 그 초원에 산으로 솟아 있다. 덩그런 섬(산)들은 빈 대지를 메워주는 것이 아니라 광막함을 더 강조하는 오브제의 역할을 한다. 적막한 사바나의 지평선 위에 서 보고 싶었던 사람에게, 그래서 이곳은 더할 수 없이 반가운 공간이다.
그런데 훨씬 오래 전, 시화호 바다에는 육지였던 세월이 존재했다. 그걸 증명하는 흔적이 최근 발견됐다. 지금 제2서해안고속도로의 고가도로가 지나는 동쪽, 방조제가 생기기 전 해수가 유입되던 조간대에 위치한 작은 섬들에서 공룡알이 나왔다. 많은 숫자의 알이 흩어짐 없이 역암과 사암층에서 발견된 것으로 봐서 이곳이 공룡이 뛰놀던 강의 상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발견된 알은 3종류 약 180여개. 알은 부화하지도 못한 채 강물에 휩쓸려 흙에 묻혀 1억년을 땅 속에, 그리고 바닷속에 잠들어 있었다. 그런 운명을 맞게 된 것은 이곳이 약한 초식공룡의 산란지였기 때문이었을 텐데, 여튼 그 깨어나지 못한 새끼들로 인해 일대 약 15㎢의 땅이 보호지역(천연기념물 제414호)으로 지정됐다.
간척지에 신도시가 건설된 뒤로도 화성에 지금의 풍경이 남아 있을 수 있다고 기대하는 건 순전히 이 공룡알들 덕이다. 송산그린시티 퓬냘痔?초입에 있는 자그마한 박물관부터 화석 산출지까지는 약 1.6㎞의 데크가 깔려 있다. 그 데크 위를 걷다 보면 마른 갯벌에 아직 남아 있는 파도의 무늬, 폐염전의 스산한 자재들, 염생식물과 육상식물이 혼생하는 독특한 식생을 모두 만날 수 있다. 사바나의 풍경 속으로 가장 깊숙이 들어가볼 수 있는 곳도 바로 여기다.
시화호엔 이른 아침이나 해질녘에 가야 한다. 그것은 부드러운 광선 속에서 낯선 초원의 분위기가 한층 그윽해지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그때 새들의 움직임이 가장 활발하기 때문이다. 한때 재앙이라는 말이 붙어 다녔던 시화호는 현재 텃새와 철새, 그리고 텃새가 된 철새들이 모여 사는 보금자리가 됐다. 현재 겨울손님의 대부분은 기러기인데 곧이어 노랑부리저어새와 고니가 찾아올 것이다. 화성은 저물녘 황금빛 하늘 속에 군집 비행을 하는 철새들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탐조 여행지 중 하나다. 본격적으로 생태학습을 할 수 있는 안산 갈대습지공원도 시화호 동쪽 끝에 붙어 있다.
마지막으로 시화호의 특별한 해넘이에 대해 얘기해야겠다. 화성은 선진국 레포츠인 경량항공기 조종의 메카가 될 가능성이 가장 큰 지역이다. 활주로와 관제 시설 건설이 추진되고 있는데, 그것이 아직 없는 지금도 네댓 개의 비행클럽이 운영 중이다. 어섬에 가면 조그마한 비행기들이 뜨고 내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경량비행기는 이륙 총중량 600㎏, 최대 수평비행속도 120노트 이하의 항공기를 지칭하는 용어로, 남녀노소 누구나 20~40시간 정도의 교육을 받으면 조종자격을 딸 수 있다. 정식 교육은 최소 20시간 단위로 이뤄지지만 15분 정도 관숙비행(조종이 적성에 맞는지 체크해 보는 비행)을 체험해볼 수 있다. 발 아래 아득한 곳에 사바나의 초원을 깔고 석양을 향하는 이카로스가 돼 보는 건, 아마도 한반도의 서해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근사한 경험일 듯하다.
[여행수첩]
●시화호 간척지로 가는 길은 두 갈래다. 안산으로 가서 시화호 방조제를 건너 형도 방면 둑방을 달리는 길, 그리고 서해안고속도로 등을 이용해 화성시 공룡알화석지를 찾아가는 길이다. 각각 어섬과 형도(방조제 방향), 우음도(화석산지 방향) 부근에서 초원 같은 풍광을 만날 수 있다. 가까이서 겨울철새를 보고 싶다면 방조제 쪽으로 가야 한다. ●공룡알 화석지에는 매주 화~일요일 방문자센터가 운영된다. 오전10~오후5시. 문화관광해설사가 상주하며 무료로 안내를 해준다. (031)357-3951. ●가까운 안산시의 시화호 갈대습지공원에 오염물 처리를 위한 수생식물을 조림한 인공습지, 철새 탐방로 등의 생태학습 시설이 있다. (031)400-1440 ●간척지에 있는 어섬에 비행클럽이 4곳 있다. 서해항공(www.seohaeair.co.kr)은 정규과정 교육비행과 유지비행, 관숙비행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031)482-4966. 대한스포츠항공협회(www.kulaa.or.kr)에서 경량항공기 조종에 대한 보다 상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031)475-2676
화성=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