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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 수집… 지독한 집착이 만들어 낸 예술적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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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 수집… 지독한 집착이 만들어 낸 예술적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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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4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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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평범했다. 그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어떤 물감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했을 뿐이다. 물감의 바다는 깊고도 넓었다. 블루에는 코발트 블루, 로얄 블루, 셀룰리언 블루, ?W트라 마린 블루, 프러시안 블루, 그린에는 샙 그린, 올리브 그린, 코발트 그린 다크, 크롬 그린 라이트, 마츠다 그린 등등이 있었다. 이쯤에서 선택해야 한다. 그냥 그리거나, 아니면 더 알아보거나. 그는 어떤 색이 더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초록을 알기 전까지는 이파리 하나도 그릴 수 없었을 뿐이다.

집착과 미술이 만나는 지점에 박미나 작가가 있다. 지독한 수집벽을 가진 그는 국내에 유통되는 모든 물감과 모든 펜, 모든 연필, 모든 캔버스의 존재를 확인하고, 모으고, 작품화한다. 가령 2002년 선보인 '오렌지 리스트'는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오렌지색 물감을 모두 사서 캔버스에 묻혀 만든 그림이다. 작가는 물감으로 특정 형태를 그리지 않고 마치 상품 카탈로그처럼 색을 붓으로 한 번 찍기만 했다. 각 색깔 옆에 써놓은 (물감회사가 붙인) 색상명은 물감의 종류를 소개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는 것을 재차 확인시킨다. 2008년에는 빨간색 볼펜 139종을 가지고 선을 그었다. 굵기도 색깔도 미묘하게 다른 139개의 빨간 선은 1㎜ 간격으로 촘촘히 그어져 몇 발짝 떨어져서 보면 주홍색 면으로 보인다.

작가가 집요하게 채집한 재료를 보며 어떤 이들은 어리석었던 한 때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과정을 완벽하게 파악하면 결과도 뜻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유아적 착각,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 후에도 그만둘 수 없었던 수집의 쾌감. 박미나의 작업은 수집의 대상이 회화의 재료일 때, 수집벽 자체가 미술이 되는 희귀한 과정을 포착한다. 19일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개인전에서 만난 작가에게 가장 하고 싶었던 질문은 '정말로 그림을 그릴 생각은 있는가'였다.

"학생일 때는 이게 작업인지 아닌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는 그림 한 장 그리지 않고 계속 재료만 수집하는 자신을 보며 물감회사에 취직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그는 실생활에서도 세면대에 10개가 넘는 비누를 사다 놓고 이것저것 써보는 신중한 소비자다.

"비누는 써보고 제일 마음에 드는 걸 고르는 게 목적이지만 물감은 그렇지 않아요. 저에게 색깔은 모두 평등해요. 여러 회사의 물감을 써보면 가장 질 좋은 제품이 뭔지 알 수 있지만 하나의 물감을 선택하기 위한 게 아니라 보여주는 것 자체에 관심이 있어요."

이번 전시에는 아크릴 물감만 썼던 작가가 처음으로 시도하는 유화 작품이 나왔다. 그 이유가 대단하다. "시중에 나온 아크릴 물감을 다 써봤거든요. 물감회사의 제품 개발 속도를 제가 따라잡은 거죠."

갤러리 1관 2층에 전시된 '12 colors' 연작은 신한, 윌리엄스버그, 렘브란트 등 7개 물감회사에서 생산된 유화물감 12색 세트 11개를 정방형 캔버스에 칠해 나열한 작품이다. 각 작품명은 회사가 붙인 색상명이고 나열 순서도 회사가 물감에 매긴 번호를 그대로 따랐다. 산업 규격에 고집스러우리만치 복종하는 작가의 행동에서는 얼핏 자학적인 냄새가 난다. 예술의 오래된 동력 중 하나인 '자아'가 삭제된 작품은 낯선 경험을 넘어 일종의 충격을 안긴다.

"어찌 보면 컴퓨터처럼 느껴질 수도 있어요. 정보를 수집하고 분류하고 가공하지 않은 채 그대로 보여주니까요. 하지만 저는 제 자신에게는 관심이 없어요. 내가 만든 법칙보다 이 사회의 법칙에는 뭐가 있는지 찾는 게 더 중요해요. 이 작품도 회사가 만든 12개의 색 전부를 모았다는 데 의미가 있어요. 이게 세상을 볼 수 있는 한 단면으로 작용했으면 좋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처음으로 시도한 추상화 'figure'는 힘든 도전이었다. 그는 과거 지인들과 나눴던 감정의 교류를 흑색, 회색, 백색의 유화 물감을 사용해 추상으로 표현했다. 이중 작가가 첫 연애에서 겪었던 혼란과 서투름을 표현한 작품은 물감을 너무 많이 덧발라 두 달이 지난 지금도 마르지 않고 있다. 이 작가의 기계성을 좋아했던 이들은 갑자기 철이 들어버린 옆집 누나를 보는 것처럼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여기에도 박미나의 언어는 어김없이 반복된다. 0호부터 200호까지, 전시장에 들어가지 않는 300호와 500호를 제외한 모든 규격의 캔버스 22개를 크기 순으로 나열함으로써 그림 틀에 얽힌 관습적 체계를 시각화했다.

사물에 대한 인간의 객관적 인지 능력을 실험하는 작가 앞에서 '다음에는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라는 질문은 무기력하다. 그저 완벽함을 향한 비효율적 집착이 상식과 효율, 결과라는 가치를 무찌르고 승리하는 순간을 보며 열광할 뿐이다.

전시는 내년 1월 19일까지 열린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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