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설계사 A씨는 지난해 B생명을 8개월 정도 다니다가 독립법인대리점(GA)으로 옮겼다. 그는 "어렵사리 실적을 채우더라도 영업비용으로 300만원 가까이 나가다 보니 빚만 늘었다"고 했다.
그런데 최근 B생명은 A씨에게 5,000만원을 환수하라는 통보를 했다. 2년의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했으니 A씨가 8개월간 받은 계약수수료와 초기정착금, 교육비 등을 전액 토해내라는 얘기였다. 친한 선배 말만 믿고 계약서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덜컥 회사를 옮긴 게 화근이었다.
B생명은 "하던 대로만 하면 2년 뒤 수수료를 더 높게 쳐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 계약서엔 '2년간 월평균 150만~200만원 상당의 월납보험료 실적을 채우지 못하면 나머지 계약 건에 대해서도 수수료를 지급하지 않는다'는 단서가 달려 있었다. 보험설계사 일을 시작한 5년 전 연봉이 1억원이 넘었던 A씨도 감당하기 힘든 계약이었던 셈이다.
A씨는 "계약서를 꼼꼼히 확인하지 않은 내 탓도 있지만 매달 할당 목표에 따라 수당을 지급하는 것은 노예계약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뒤늦게 후회했지만 GA로 이직하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불공정계약으로 인한 피해가 늘면서 보험업체에서 GA로 발길을 돌리는 보험설계사들이 늘고 있다. 23일 생명보험협회에 따르면 보험사 전속 설계사 수는 지난해 말 15만7,000여명에서 최근 14만6,000여명으로 줄었다. 반면 GA 소속 설계사 수는 같은 기간 9만2,000명에서 10만2,000명으로 증가했다.
불황으로 비용절감에 나선 보험사들이 실적이 부실한 보험설계사들을 일방적으로 내쫓고, 기존 설계사들에게는 무리한 영업목표를 할당하는 등 불공정계약 증가 탓이라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최근 GA로 옮긴 보험설계사 김모(31)씨는 "고객이 보험을 해지하면 이유를 불문하고 무조건 수수료를 환수해가는데, 한번에 600만원을 청구하면서 갚지 않으면 10%대의 연체이자까지 물어내라고 하니 당장 신용불량자로 전락할 판"이라고 호소했다.
실제 한화 교보 신한 등 대부분 생명보험업체의 위탁계약서에는 청약 철회, 민원 등으로 인한 보험 해지 시 설계사에 지급된 수수료를 전액 환수한다는 조항이 들어있다. 불완전판매 등 보험설계사의 과실이 입증되지 않은 민원 해지나 청약 철회에 대해서도 설계사에게 책임을 전적으로 떠 안긴다는 것이다. 회사를 그만두거나 이직하면 관행적으로 보험계약 유지 시 제공되는 잔여수수료도 지급하지 않는다.
불공정계약이 발생해도 제대로 항의조차 할 수 없는 구조 역시 문제다. 보험사와 위탁계약을 맺는 보험설계사들은 공정거래위원회 등에 불공정계약 신고를 할 수 있지만 최근 5년간 공정위의 관련 신고처리 건수는 단 2건에 불과하다. 잔여수수료 지급, 환수금 부당 청구 등과 관련한 민사소송에서도 1건만 빼고 대부분 보험설계사가 패소했다.
법 개정도 늦어지고 있다. 보험설계사 계약 시 발생하는 불공정계약에 따른 처벌 조항을 강화하는 내용이 포함된 보험업법 개정안이 국회에 상정됐지만 다른 법안에 밀려 계류 중이다. 보험설계사 등이 포함된 특수고용직의 노동3권(단결권, 단체협상권, 단체행동권)을 보장하는 내용의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도 20일 국회 법안심사소위에서 보류됐다.
오세중 대한보험인협회 대표는 "보험설계사들이 보험사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대응할 방법이 제한적"이라며 "수수료 체계를 명확하게 하고, 불공정계약에 따른 피해를 보상받을 수 있는 관련 법 통과가 급선무"라고 지적했다.
강지원기자 styl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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