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점을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꾸며서 논의에 대한 참여를 아예 배제시키는 특기를 가진 이들이 있다.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예상되는 사안에는 어김없이 이런 특기가 발휘된다. 나 같이 바보 국민들은 이야기가 조금만 복잡해지면 그만 골치가 아파져서 "뭐 다 잘되겠지" 하며 관심을 끊는다. 그러니 우리의 무관심은 자발적이라기보다 '강요된 무관심'이라고 부르는 게 정말 옳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모두의 일이기도 한 사회적 사안들은 이렇게 제대로 된 논쟁이나 합의도 거치지 않은 채 어느새 기획자의 뜻대로 결정되는 것이다.
크게 보면 '정치적 무관심'이란 게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하고, 작게 보면 수많은 정부 정책이 이런 식으로 몇몇 정치인과 관료들의 손바닥 위에서 수립된다. 혹시 그런 과정에서 분란이라도 생기면 국회의원들이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우는 모습이나 시뻘건 머리띠를 두르고 악쓰는 노동자 농민을 집중적으로 TV 화면에 비추면 된다. 사안의 핵심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혐오감만 유령처럼 남는다. 그조차 효과가 없을 때는 최후 수단이 있다. 바로 북한이다. 때맞춰 미사일을 쏘거나 무시무시한 공개처형을 하니 뉴스거리를 걱정할 일이 없다.
모두 아는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다시 꺼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수서 발 KTX 민영화는 이런 과정을 어찌 그리 빼닮았는지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주식회사를 만들지만, 민영화는 아니란다. 즉 이윤을 추구하지만,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란다. 물류나 정비 등에 경쟁을 도입해야만 효율성이 높아진다는데 그 효율성이 이윤을 위한 것이 아니란다. 경쟁이 과연 효율성을 위한 것인지, 거기에서 이익을 취할 누군가를 위한 것인지도 말하지 않는다. 복잡한 경영이론과 통계학만을 내세울 뿐이다.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는 첫머리를 철도파업과 그새 두 배로 늘어난 4,000여 명 노조원의 직위해제를 언급하며 시작한다. 밀양송전탑을 둘러싼 어르신들의 자살과 88만원 세대의 강요된 침묵을 언급하며 우리들의 '안녕'을 묻는다. 대자보를 처음 쓴 고려대 주현우씨는 어떤 기획도 배후도 없이 그저 상식을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불순하고 불의한 기획들을 복잡한 '팩트'로 치장하고 덮으려는 이들에게 '상식'을 보여준다.
나는 대자보 전문을 꼼꼼히 읽으면서 이 글이 담은 사상에 얼마나 깊이 공감했는지 모른다. 대자보가 언급한 정치적 사안들에 공감했다는 게 아니라 이 '안녕치 못한' 세상이 바로 당신과 내가 사는 세상인데 과연 '안녕하시냐'는 물음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젊은 대학생은 우리가 함께 공유하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꼭 남겨둬야 할 공공적인 것을 사적인 것으로 만드는 모든 기도에 대해서 질문을 던진다. 철도라는 것, 선거행위라는 것, 대대로 농사지어온 땅, 젊은이들의 노동권이 경쟁과 사유의 논리 앞에서 다 무너지고 있는 지금, 우리들이 겪는 고통이야말로 먼저 공유해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고 묻는다.
대자보를 읽으며 바로 떠오른 것은 우리들의 자본주의가 겪은 최초의 비극적 사태였다. 자본주의 태동기였던 15세기 이후 영국 등지에서 수백 년 간 벌어졌던 인클로저 운동이다. 농민들의 세금과 공납에 의존하여 부를 누리는 대신 농토와 신체적 보호를 제공하던 영주․지주들은 도시산업의 수요에 맞춰 농민 공유지와 임자 없는 교회토지, 황무지에 대거 울타리를 치고 농민들을 내쫓는다. 농민들은 졸지에 땅을 잃고 도시노동자나 농업노동자의 신세로 내몰린다. 공적인 토지와 자원을 사적인 소유자나 국가가 통제하지 않으면 반드시 파괴되고 만다는 저 낡은 '공유지의 비극' 이론은 과거에 농민 공동체가 얼마나 오래도록 땅을 가꾸고 삶을 공평하게 의탁해 왔는지를 숨기는 허구일 뿐이다.
철도를 누군가의 소유로 만들고,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송전탑 밑의 농토를 망치고, 결국 우리들의 안녕한 삶의 기반을 몽땅 소유하려는 복잡하고 현란한 기획들에 대해 대자보는 삶의 '공감'과 '상식'으로 맞서고 있는 것이다. 과연 안녕들 하시냐고.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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