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가까이 인문학 책 편집을 하면서 판에 박은 듯한 고전 자료 이미지 편집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저뿐 아니라 비슷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체로 그럴 텐데, 독서를 돕는다는 이유로 새로울 것도 없는 이미지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경향에 대한 반감도 느껴왔고요. 모두 아름다운 책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들이죠."
제54회 한국출판문화상 편집 부문 수상작 을 만든 글항아리 편집자 이은혜(37)씨는 "고문서를 다룬 책들의 이미지 과잉은 가능하다면 많은 것들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저자와 편집자의 욕심이 크게 작용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문화재 가치가 없고 보존 상태도 그리 좋지 않아 종이공예가를 제외하면 누구에게나 애물단지 취급 받는 고서 이야기를 담은 이 책에는 비슷한 유형의 다른 책에서는 볼 수 없던 이미지들이 글과 맞춤하게 어우러져 펼쳐져 있다. 줄줄이 등장하는 고서의 페이지 페이지, 옛 그림들의 과감한 클로즈업 정도는 그리 색다르다고 말하긴 힘들다. 이 책에는 고서의 내용을 보여주는 이미지 못지 않게 고서 그 자체가 다양한 포즈로 등장한다. 종횡을 맞춰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는가 하면 공중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암흑으로 배경이 죽은 상태에서 낡고 닳은 애처로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도 한다. 이쯤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 책의 이미지는 사진스튜디오 작업의 결과물이다.
"그 동안 도판 작업을 많이 했지만 박물관에서 제공 받은 사진이나 자료 스캔 이상의 방법을 생각하기 어려웠어요. 편집의 틀을 깨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참에 이 원고를 받았고 저자가 글을 쓰는 데 활용한 고서 자체가 있으니까 스튜디오 작업을 해보면 좀 다른 이미지가 나오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소개를 받고 찾아간 사진작가 김춘호씨의 스튜디오에서 이씨는 그만 주눅이 들고 말았다. 작가가 영화 사진 전문이어서 스튜디오에는 유명 배우들의 사진이 쭉 걸려 있었다. 편집자는 "이렇게 볼품 없는 책을 화려한 조명 아래서 찍는다는 위축감"이 들었지만 사진작가는 반대로 처음 해보는 작업이라 적지 않은 호기심을 보였다고 한다.
저자인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선임연구원도 함께한 촬영은 하루 만에 끝났으니 사진 작업 자체가 엄청났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이씨는 아무리 인문학서라고 해도 기성의 자료를 이용해 본문 편집 정도에서 최대한의 기술을 발휘해보는 식이 아니라 그 이전 사진 작업이 가능하고 그것을 통해 책을 다르게 만들 수 있다는 귀중한 체험을 했다.
그래서 이 책 이후 진행 중인 책들에도 사진 작업에 공을 들이고 있다. 그 중 한 책은 박물관에서 제공하는 자료로는 한계가 있어 책의 중요한 이미지가 되는 풍속화를 담은 8폭 병풍을 사진작가를 동원해 2시간 넘게 정밀 촬영했다. 전체 모습은 말할 것 없고 풍속화 속의 인물 하나하나를 클로즈업해서 찍었다. 이씨는 "직접 자료를 찾아 사진으로 찍어서 편집하는 것은 분명히 책을 다른 느낌으로 만들어 준다"며 이 자신에게 "편집의 돌파구를 만들어준 느낌"이라고 말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