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그룹 법정관리 사태 이후 대한항공은 이른바 시장의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있었다. 부채비율이 높고 유동성 사정이 좋지 않은, '고위험군'기업이었다. 회사측은 '위기설은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했고, 실제로 리스 자산이 많은 업종 특성상 부채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었지만, 시장에 한번 돌기 시작한 소문은 일파만파로 번져갔다. 이에 당국은 재무구조를 개선하라는 압박강도를 높여왔다.
결국 대한항공이 재무구조개선안을 내놓았다. 자산매각 규모만 무려 3조5,000억원에 달하는, 시장의 예상을 뛰어넘는 초고강도 자구안이다. 애지중지하던 알짜 자산까지 처분함으로써, 시장에서 루머가 더 이상 퍼질 싹 자체를 자르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대한항공은 19일 임시이사회를 열어 에쓰오일 지분 매각, 노후항공기 처분 등을 골자로 한 재무구조 개선계획을 확정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역시 에쓰오일 지분이다. 비행기 선박 등 기름수요가 많은 대한항공은 안정적 공급선 확보를 위해 지난 2007년 이 회사 2대 주주로 등극, 최대주주인 사우디 아람코와 함께 공동경영을 해왔다. 하지만 이번에 결국 이 주식을 처분키로 한 것인데, 이를 통해 2조2,000억원을 마련할 계획이다.
또 B747-400, B777-200 등 연료 소모가 많은 구형 항공기 13대를 매각해 2,500억원을 확보하고, 부동산과 투자자산도 팔아 1조400억원을 추가 마련키로 했다.
이상균 대한항공 재무본부장은 이날 증권거래소에서 열린 경영설명회에서 "에쓰오일 주식은 내년 1분기에, 항공기와 부동산 등은 2015년까지 2년에 걸쳐 각각 매각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대한항공은 이번 자산매각계획에 따라 800%까지 치솟은 부채비율이 400%대로 낮아질 것이라고 밝혔다.
예상외의 고강도 자구안에 채권단 평가도 좋다. 채권단 관계자는 "이번 자구책으로 대한항공은 숨통이 트이게 될 것"이라며 "특히 항공기 일부 매각 등 자구계획은 적절했다고 본다"고 밝혔다.
이번 자구계획안에서 또 하나 관심을 끄는 건 한진해운에 대한 추가 지원이다. 10월 말 1,500억원에 이어 이달 중 1,000억원을 더 지원키로 했으며, 내년 상반기엔 4,000억원 범위 내에서 유상증자에도 참여키로 했다.
한진해운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제수인 최은영 회장이 향후 법적 계열분리를 전제로 그룹 내 소그룹(한진해운홀딩스) 형태로 독립경영을 해왔다. 하지만 이번 대한항공의 지원으로 한진해운의 독립은 사실상 물 건너 갔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대한항공은 이미 지난 10월 지원 때 한진해운홀딩스가 보유한 한진해운 주식을 담보로 잡았는데, 현재 해운경기여건상 이 돈을 갚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여기에 대한항공이 내년 유상증자까지 참여하게 되면, 최은영 회장의 지배력은 급속히 약화될 전망이다. 대신증권 양지환 연구원은 "대한항공이 한진해운 유상증자에 들어가면 모회사인 한진해운홀딩스의 대주주가 대한항공으로 바뀌는 것이므로 (최 회장의) 계열 분리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대한항공 관계자는 "지금은 한진해운의 급한 불을 끄는 게 급선무"라며 "계열분리나 경영권 문제를 논할 상황이 아니다"고 말했다.
김정우기자 woo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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