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제주도에 다녀왔다. 제주도로 이주했지만 회사 일 때문에 가끔 서울로 올라오는 후배 덕분이었다. 그녀의 빈 집에 머물며 제주도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제주도는 역시 대중교통으로 여행하기가 참 힘들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항간에 떠도는 중국인들의 '제주도 점령설'은 그저 웃고 넘길 수만은 없는 일로 보였다. 5억원만 내고 5년만 거주하면 영주권을 내 준다더니 정말 어디를 가나 중국어가 들려왔다. 중국인들의 투자 바람은 제주에 정착하고자 하는 육지 청년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근 2년 사이에 집값이 두 배 이상 뛰었는데도 매물이 없어 집 구하기가 힘들 정도라고 한다.
제주도에 갈 때마다 느끼지만 육지에서 내려온 젊은이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인구가 증가하는 도라고 하더니, 이제는 어디를 가나 육지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 특히나 여자들이 많아졌다. 전국의 결혼하지 않은 30~40대 여자들이 다 제주도에 내려온 건가 싶을 정도로 혼자 사는 여성들이 늘었다. 안 그래도 여자가 많은 섬에 이제 '육지 여자'까지 몰려들어 제주도가 음기충천이라는 농담이 오갈 정도다.
그녀들이 제주에 내려와 살아가는 모습도 예사롭지 않다. 동쪽 바닷가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K씨는 농가 주택을 개조해 집 거실을 카페로 사용하고 있다. 테이블 두 개가 전부인 그곳의 영업시간은 주인 마음대로. 마음이 내키는 날, 트위터로 문 여는 시간을 공지한다. 역시 바다를 낀 마을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N씨. 그녀의 카페도 테이블 두 개 규모로, 정해진 영업시간이 없다. 그 옆집은 서글서글한 인상의 D씨가 혼자 꾸려가는 식당이다. 딱 한 가지 메뉴로 문을 여는 이곳의 영업시간은 점심 세 시간, 저녁 두 시간. 그나마 재료가 떨어지면 그날 장사는 끝이다. 제주말로 '알록달록'이란 뜻을 가진 벨롱벨롱에서 이름을 딴 외지인들이 꾸려가는 벨롱장은 또 어떤가. 각자가 재주껏 만든 물건과 음식을 가지고 나와 한 달에 한 번, 낮 11시부터 12시까지 한 시간 남짓 열리는 장터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아등바등 돈벌이에 매달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적게 버는 대신 그만큼 시간을 즐기며 살 수 있으리라. 그녀들의 카페나 식당은 화려하거나 세련되지도 않고, 프로의 냄새도 나지 않는다. 인테리어는 어딘가 어수룩하거나 살짝 촌스럽기까지 하다. 음료나 음식은 2%쯤 부족한 맛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곳에는 꾸미지 않은 활기와 서운하지 않을 정도의 무관심과 부담스럽지 않은 배려가 있다. 아마추어들이 자신의 삶을 충만하게 누리고 있는 느낌이랄까. 찍고, 구경하고, 평가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움직여 직접 만들어가는 삶이 녹아있다. 놀이를 구매하기 위해 노동을 해야만 하는 일상의 고단함과 서글픔이 그녀들에게서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 젊은 여성들의 모습에서 나는 또 다른 세계의 모습을 본다. 시스템 속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살고 싶은 세계를 만들어내는 모습. 누군가에게 삶을 맡기지 않고 자신의 삶을 디자인 하는 모습. 새롭고 즐거운 저항의 방식이다. 좀 길지만 내가 좋아하는 작가 존 버거의 글을 인용해본다. "힘있는 자들과 그들 소유의 매체에서 하는 대로, 전통적인 어휘를 써서 오늘의 세상에 '참여'하게 되면, 어둠과 파괴만을 주위에 더하게 될 뿐이다. 그렇다고 침묵하라는 말이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어휘와 음색을 선택하라는 의미다."
지금 제주에 내려온 그녀들은 자신들만의 어휘와 음색을 선택한 것 같다. 세상을 바꾸는 강력하고도 유일한 방법인 자신의 삶을 바꿔버리는 방식으로. 그이들의 용감한 선택에 박수와 지지를 보낸다.
제주는 이제 점점 더 아름다운 섬이 되어가고 있다. 거친 역사의 파도에 맞서온 섬 주민들의 고단하고 강인한 삶에 더불어, 이제는 육지에서 온 그녀들이 만들어내는 싱싱하고 새로운 삶이 더해지고 있으니.
김남희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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