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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오해받는 지명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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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오해받는 지명 (상)

입력
2013.12.19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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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이름을 비롯한 지명에는 전설과 설화가 얽혀 있고,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그 지역의 이야기와 주민들의 삶이 녹아 있다. 우리 고향 동네에서 가까운 곳에 농바위라는 곳이 있다. 농바위는 바위가 장롱처럼 네모반듯한 모양이거나 반닫이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농바위는 경기 양주시 백석읍 방성리 불곡산 자락에도 있고, 경남 하동군 횡천면 횡천리에도 있다. 서울의 중심인 종로구 평창동에도 농바윗골이 있다. 대표적인 농바위 전설은 어느 날 힘센 장사가 나와 그 큰 바위를 열고 속에 숨겨둔 무기로 나라를 구한다는 것이다. 이런 전설 때문에 땅 이름이나 동네 이름을 '살아 있는 문화의 화석'이라고 하나 보다.

그러나 전설은 좋지만 발음이나 의미가 이상한 지명은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멸치축제로 유명한 부산광역시 기장군의 대변항은 '아름다운 어촌 100곳'(해양수산부 선정) 중 하나다. 대변(大邊)은 해변이 크다는 뜻이지만, 사람들은 자꾸만 大便을 연상한다. 그곳의 대변초등학교에는 '푸른 꿈을 가꾸는 대변어린이'라는 구호가 건물에 붙어 있는데, 놀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푸른 똥을 가꾸는...'이라며 낄낄거린다.

먹고 마시는 걸 연상케 하는 지명도 많다. 그런 걸로 말을 만들어볼까. 우선 광주 서구 화정동 방구리에 찾아가 방구리를 산다. 방구리는 물을 긷거나 술을 담는 데 쓰는 질그릇으로, 동이보다는 좀 작다. 이어 경남 양산시 웅상읍 소주리에 가서 방구리에 소주를 가득 담는다. 다음 충북 제천시 수산면 계란리, 경북 군위군 의흥면 파전리, 전남 완도군 생일면 봉선리와 전남 여천군 돌산읍 평사리의 굴전마을에 각각 들러 계란을 넣어 부친 파전과 굴전을 안주로 즐겁게 술을 마신다. 술 배와 밥 배는 따로 있으니 경남 김해시 진영읍 우동리에서 우동을, 경기 양평군 양서면 국수리에서 국수를 더 먹어볼까.

이제 술과 음식을 배불리 먹었으니 팔도강산 종횡무진 갈지자로 떠나보세. 길 가는 사람 붙잡고 주정(충남 청양군 대치면 주정리)하거나 구라(대구 달성군 화원읍 구라리) 풀지 말고 방광(전남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이 가득 찼거든 적당히 실례를 하라. 허위허위 걷다보니 어느덧 날이 저물었구나. 전북 순창군 풍산면 대가리에서는 머리를 특히 조심하고 전남 담양군 담양읍 객사리에서는 객사하지 않게 정신 차려라. 그렇게 걷고 걸어 전북 정읍시 산외면 목욕리에 이르러 시원한 물에 몸을 담그면 온 심신이 개운해질 것이다.

걷는 동안 민망한 동네를 만나더라도 결코 흔들리거나 유혹돼서는 안 된다. 경기 용인시 처인구 유방동은 그냥 그러니라 하고 지나쳐라. 전남 완도군 보길면 정자리나 충북 음성군 생극면 생리, 전남 곡성군 삼기면 월경리는 그 정자, 그 생리, 그 월경이 아니니 오해하지 말기를. 아까 맨처음에 들른 방구마을(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 방구리)에서는 소리가 좀 요란하거나 냄새가 심하게 나더라도 꾹 참지 않았던가.

그런가하면 전남 영광군에는 백수읍이 있고, 전남 고흥군 포두면 상대리에는 백수마을이 있다. 인터넷에 떠 있는 백수초등학교 제XX회 동창회 사진을 보면 졸업생들이 괜히 걱정스럽다. 학교는 조각공원처럼 이쁘다고 한다. 고참마을이라는 이름도 웃음을 자아내는데, 전남 영광군 군서면에는 만금리와 마읍리에 다 고참마을이 있다. 어디가 더 고참인지는 모르겠다. 신참마을은 없나 궁금했지만 찾아낼 수 없었다. 신참 시절은 고생스러워서 다들 싫어하나 보다.

고참 신참을 따지다 보면 군대 계급과 같은 지명에 눈길이 간다. 전남 여수시 소라면 사곡리, 전남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 경남 김해시 대동면 조눌리에는 하사마을이 있다. 서울 강서구 개화동,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 전남 순천시 상사면 응령리에는 하사보다 높은 상사마을이 있다. 경북 포항시 죽장면에도 상사리가 있다. 전북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에는 중사마을이 있는데 한자도 中士다. 전남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 전남 영광군 백수읍의 경우는 상사리와 하사리가 다 있다.

좀 더 계급이 높은 걸 알아볼까. 전북 군산시 회현면 고사리에는 대위마을이 있고, 전남 여수시 화양면 나진리에 소장마을, 경남 의령군 유곡면 송산리에 중장마을이 있다. 경기 부천시 오정구 대장동, 경남 산청군 금서면 매촌리, 경기 고양시 덕양구 대장동에는 대장마을이 있다. 그러면 그보다 더 높은 원수는? 충남 서천군 장항읍, 전북 익산시 여산면에 각각 원수리가 있다. 그런데 이런 동네는 元帥가 아니라 각각 元水, 源水라고 쓴다.

사람들은 원수라는 말을 들으면 대장보다 높은 계급이 아니라 복수의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 지명이 우스운 것이다. 하지만 한자로 이름을 알고 보면 다 그럴 만한 유래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경남 하동군 하동읍 목도리는 목에 두르는 게 아니라 牧島里, 조선시대에 말을 놓아 먹였다는 기록이 있는 곳이다. 광고에도 등장한 경남 거제시 일운면 망치리는 두드려 못을 박는 망치나 일을 망친다는 뜻이 아니다. 望峙, 즉 망보는 고개라는 의미이다. 충남 보령시 동대동과 성주면 성주리 사이의 고개도 망치고개다.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 fusedt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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