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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에 바치는 오마주… 삶의 공포·도덕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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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에 바치는 오마주… 삶의 공포·도덕 탐구

입력
2013.12.18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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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턱 하나만 넘어서면 죽음과 얼음을 마주하는 동토 사할린. 러시아의 세계적 작가 안톤체호프는 거기서 덧없는 3개월을 보낸 뒤 자신의 작품에서 웃음기를 걷어냈다. 사할린 여행 이듬해에 쓴 단편소설 '공포'(1892년 작)가 그 출발점이다. 극단 그린피그가 이 소설을 토대로 창작해 서강대 메리홀 무대에 올린 연극 '공포'(박상현 연출ㆍ고재귀 작ㆍ13~22일)는 인간의 가장 본원적 심리 중 하나인 공포에 대한 이야기면서 동시에 체호프에게 바치는 오마주다.

소설의 주인공 '나'를 체호프 본인으로 설정하고 등장인물과 배경, 대사를 대부분 그대로 살려냄으로써 관객은 청년 체호프를 무대에서 만난 듯하다. 22쪽에 불과한 짧은 소설(민음사 발행 기준)을 2시간 30분(7장)에 달하는 장막극으로 펼쳐냈다는 점, 장소의 전환 없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캐릭터들의 독백을 입체적으로 표현했다는 면에서 연극 '공포'는 체호프의 희곡 스타일과 매우 닮아 있다.

각 장을 성경 구절로 시작하는 이 작품의 고갱이는 죄야말로 의지의 결여에서 비롯되며 모든 공포는 죄를 인정하지 않고 일상을 이어가는 인간의 의식적인 게으름에서 싹튼다는 설정에 있다. "선은 마음이 아니라 의지"라는, 원작 소설 깊숙이 숨겨진 메시지를 발견해 객석으로 알기 쉽게 전달한 점을 높이 살 만하다. 극중 실린(이동영)이 "유령보다 무서운 게 이해할 수 없는 일상"이라고 부르짖는 장면, 주정뱅이 가브릴라(신재환)가 '필사의 의지'로 남긴 마지막 술 한 병을 죽은 이의 무덤에 뿌려주는 '선'을 행하는 부분이 공포와 선의 연장선을 뚜렷이 그려낸다.

이 연극의 마지막은 극중 체호프가 평소 자신을 사랑하는 실린의 처 마리야(김수안)와 동침을 했다가 실린에게 들키는 장면이다. 가브릴라가 선을 결행한 데 충격을 받은 체호프가 나약함이 죄를 부른다는, 일종의 공포감을 벗어나기 위해 마리야를 탐했다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짧은 소설에서 체호프의 정수를 뽑아내 장막극으로 펼쳤음에도 느슨함이 없다. 죄와 공포의 근원을 짚어내기 위해 신부들을 등장시킨 시도도 넘치지 않게 적당하다. 연극 '천개의 눈'과 '가모메'에서 뛰어난 공간감을 만들고 캐릭터들의 원활한 연결을 이뤄낸 무대디자인으로 주목받은 박상봉의 무대도 알찼다. 생명을 씻어낸 듯 메마른 자작나무들은 무채색의 공간과 차갑게 식어버린 러시아의 동토, 그리고 하얗게 질린 인간의 공포를 떠올리게 한다. 뚝뚝 떨어진 채 사선으로 배치된 가구들은 캐릭터 간 원근감을 돋보이게 한다.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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