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떠들썩함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 어딜까. 이맘때 드는 생각이다. 오늘 밤을 보내고 나면 전혀 새로운 아침이 시작되는 듯 배릿한 감상에 젖어 취기에 의탁하는 연말. 하지만 자고 일어나면 기다리고 있는 건 다시 하루치의 권태가 할당된, 어제와 다를 것 없는 흐릿한 일상일 뿐이다. 어쩌면 익히 알고 있기에, 외면하고, 그리고 반복한다. 그 부박한 세밑의 도시에서 벗어나고 싶어 택한 경주행. 번요한 세상의 정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머릿속 화살표의 끝에 겨울 왕릉의 모습이 보였다. 천년의 저쪽에 묵직히 뿌리를 내린 저묾의 풍경이 거기 펼쳐져 있었다.
서라벌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도시다. 이 말을 이해하는 데 고고학의 지식은 없어도 된다. 도심에 있는 노서동 고분군에 가보면 그냥 안다. 밤이면 환락가가 되는 상업지구와 한 무리의 고분이 배를 맞대고 있다. 현란한 러브호텔들의 네온사인과 야간 조명을 받은 6세기 왕들의 무덤이 겹쳐져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난감하다 못해 차라리 이국적이다. 신라의 사직단이 개미무덤이 되고 나서 1,078년이 흘렀다. 음택에 누운 왕들은 계절에 한 번씩 봉분에 입힌 떼의 색이 바뀌는 걸 보면서 천년의 깊이를 쟀을 텐데, 1분에 열 번씩 컬러를 바꾸는 욕망의 불빛이 봉분을 뒤덮는 밤마다 왕들은 몸을 뒤척이고 있을 것 같다.
눈에 거슬리는 풍경부터 말했다. 지금 경주 시내 왕릉의 모습이 그러하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도시'라는 표현은 그러나 본래는 이런 뜻일 게다. 삶의 바로 곁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삶을 배척하지 않는다는 인식의 공간적 구현. 생활 공간 한복판에까지 무덤을 쓴 신라인의 땅에 와보면 그 의미를 피부로 느끼게 된다. 그게 죽은 이들이 산 사람을 지켜줄 것이라는 염원에서 나온 것인지, 누리던 권세를 죽은 뒤까지 버리지 못하는 미망에서 나온 것인지는 고고학자가 가릴 일. 여행자는 다만 그 공존의 풍경이 빚는 은연한 빛깔의 적요를 누리면 된다. 차갑고 깊다. 그래서 두개골 속의 너덜거림을 그 적요는 가라앉혀 준다.
경주 여행길에 찾아가 보는 왕릉은 흔히 대릉원과 오릉 정도다. 조금 부지런하다면 형산강 너머 서쪽에 있는 김유신묘와 무열왕릉도 가봤을 수 있겠다. 그렇게만 봤어도 이미 수십 기의, 고고학적 또는 역사적 가치가 큰 왕릉들을 훑어 본 것이다. 나쁘지 않다. 하지만 세밑의 적적한 발걸음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많지 않은 왕릉들이 더 어울린다. 그것들은 관광지구의 중심에서 떨어져 있거나, 왕릉이라기엔 규모가 초라하거나, 모지라져 주인을 밝히기 송구한 것들이다. 그래서 조용히 생각에 잠길 여유가 그곳에 자리한다. 코스를 한 번 짜보자.
괘릉은 울산으로 이어지는 7번 국도변, 경주시 외동읍의 논가에 있다. 시내 중심부에서 약 12㎞ 거리에 홀로 있다. 황남동이나 노서동에 다세대주택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왕릉들과 비교하면 낙도의 외딴집 같다. 멀리 경기도 연천 땅에 있는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릉, 바다에 수장됐다고 전하는 문무왕릉 다음으로 멀다. 하지만 신라 왕릉을 오래도록 찾아가고 연구한 사람들이 첫손에 꼽는 빈도가 가장 높은 왕릉이다. 8세기 말의 것으로 원성왕의 무덤으로 전해진다. 괘릉이라는 이름은 이곳이 본래 연못이었는데 못을 메우지 않고 수면 위에 왕의 시신을 걸어(掛) 장례를 치렀다는 전설에서 유래됐다.
겨울 왕릉을 찾아 경주에 갔다면 이른 아침, 첫 번째 답사지로 괘릉으로 가는 것이 옳다. 해는 남쪽으로 치우친 곳에서 누워서 뜨면서 수평에 가까운 각도의 햇살을 쏟아 놓는다. 햇살은 날카롭다. 호위군처럼 능을 감싼 아름드리 안강송을 뚫고 들어가 능을 직격하며 둥근 캔버스에 태양의 무늬를 그린다. 왕릉이 담묵의 겨울 안개를 두른 날, 또는 하얀 눈에 쌓인 날, 그 작업은 몽환적인 붓질로 변한다. 이곳에선 어떤 남자를 만날 수 있다. 왕을 지키고 선 무사다. 세월에 깎이고 문드러진 그의 표정은 아침 햇살을 받을 때 다시 살아난다. 그런데 석상의 얼굴 윤곽이 낯설다. 왼쪽 주먹을 불끈 쥐어 가슴에 올리고 해 뜨는 곳을 바라보고 있는 그는 중앙아시아의 소그드에서 온 서역인이다.
괘릉에서 7번 국도를 타고 시내로 오는 길에 친형제지간인 효소왕과 성덕왕의 능이 나란히 있다. 이정표가 있지만 그것만으론 찾기 힘들다. 철로를 건너고 구불구불한 흙길을 걸어야 닿을 수 있다. 왕릉이라기보단 평범한 집안의 선산 가는 길 같다. 효소왕릉은 일반 무덤의 봉분보다 조금 더 크다. 호석(봉분의 밑둘레를 보호하는 구조물)과 잡상을 갖춘 비슷한 시기 왕릉에 비하면 민둥한 모습이 처연하다. 하지만 그 모습이 오히려 푸근하다. 참나무들이 마지막 잎사귀를 떨어뜨리느라 분주했다. 옆의 동생은 비석을 받치는 돌거북을 한 마리 거느리고 있다. 비신은 잃어버리고 목은 오래 전에 도둑맞았지만, 거북은 여전히 씩씩한 모습으로 제 주인을 지키고 있었다.
형제 임금의 무덤을 지나 조금 더 가면 나지막한 산을 만나게 된다. 낭산(108m)이다. 이 산 중턱에 선덕여왕이 잠들어 있다. 이젠 태종무열왕보다 더 인기 있는 신라의 왕이지만, 능까지 이어지는 산속 오솔길이 비교적 길어 왕은 찾아오는 이 없이 고적하게 지낸다. 500m 남짓한 솔숲길, 나무 사이로 터진 하늘을 왕관처럼 쓰고 있는 여왕은 여전히 우아하다. 왕위를 물려받은 진덕여왕의 능도 무척 깊숙한 곳에 있다. 형산강 너머 동녘골이라는 작은 마을 뒤 산기슭에 있는데 역시나 찾아가는 길이 호젓하기 그지없다. 동해 용왕의 아들 처용에게 벼슬을 내린 헌강왕릉도 가까운 곳에 묻혀 있다. 이밖에 그들의 대를 이은 왕들도 대부분 외진 곳에 자그마한 봉분 속에 누웠다. 그래서 찾아가는 길이 고즈넉하다.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이상의 무덤 주인들이 신라 전성기의 왕이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런데 능은 대부분 입구까지 차가 들어가지도 않는 외진 곳에 있다. 나라가 가장 강성했던 시절 권력자들의 무덤이 이토록 초라하다면, 시내 한복판에 있는 거대한 무덤들은 대체 누구의 것일까.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그것은 초기의 무덤들이다. 아직 금속제 농기구를 쓰는 법을 모르고 왕성의 토대를 흙으로 겨우 쌓던 시절, 신라인들은 무덤을 크게 만들고 각종 금붙이와 때론 산 생명까지 순장했다. 그때는 풍수지리의 관념도 아직 수입되기 전이라 무덤들은 제멋대로 뭉치거나 흩어져 있다. 그 풍경은 이천년이 다 되도록 낯설어서 경주를 찾는 사람들에게 볼거리가 돼 준다.
경주 외곽의 왕릉 가운데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아가는 곳은 남산 서쪽 능선의 삼릉이다. 박씨 성을 지닌 세 임금의 무덤으로 전해진다. 이곳은 등산 코스에 포함돼 있기도 하지만 능 앞의 넓은 소나무밭 때문에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안개 낀 아침 맘껏 휘어 뻗은 소나무의 풍경은 값비싼 사진으로 유명해져 이젠 한국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됐다.
겨울 왕릉 기행의 마지막은 진평왕릉이 적절하다. 불국사로 가는 길, 낭산의 동쪽 자락에 하늘의 천사로부터 옥대를 내려 받았다는 진평왕이 잠든 자리가 있다. 무덤은 너른 개활지 가운데 있고 늙은 나무들이 왕을 바라보는 자세로 굽히고 서 있다. 거기로 내려와서 왕들이 잠든 땅속으로 잠기는 노을이 경주에서 맞을 수 있는, 어쩌면 세밑의 겨울 하늘 아래서 맞을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저녁일 것이다.
[여행수첩]
●시내버스 운행횟수가 충분해 차를 가져 가지 않아도 경주 외곽의 왕릉들을 둘러볼 수 있다. 괘릉 방면은 600, 605, 607, 608, 609번, 진평왕릉 방면은 12번 버스를 타면 된다. www.gumabus.com (054)742-2691 경주시티버스를 이용하면 여러 역사문화 유적을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편안하게 탐방할 수 있다. www.gyeongjucitytour.com ●경주의 민간 문화기관인 신라문화원과 경주남산연구소에서 문화 체험과 고택 체험, 유적 답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역사를 테마로 한 경주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신라문화원 (054)774-1950 경주남산연구소 (054)777-7142
경주=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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