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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의 의로운 삶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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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의 의로운 삶 기억하자"

입력
2013.12.18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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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젊은이들이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테러'로 알고 있다는 것은 정말 충격적입니다. 윤 의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 군인의 신분으로 목숨 걸고 일제의 침략전쟁에 맞선 분입니다."

19일은 매헌 윤봉길(1908~1932) 의사가 일본군 형무소에서 가혹한 고문과 총살형을 받고 24세 나이로 서거한 지 81주기가 되는 날이다. 윤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일왕 생일 및 일본군의 상하이(上海) 사변 전승 축하식이 열린 중국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에서 수통형 폭탄을 투척, 시라카와(白川) 대장 등 일본군 간부들을 살해하는 의거를 감행했다. 윤 의사는 그 후 일본군에 붙잡혀 5월 25일 상하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윤 의사의 조카인 윤주(66) 매헌기념관장은 18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요즘 학생들 중에는 윤봉길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있을 만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교육이 잘 안 되고 있다"며 "한 평생 자유와 평등, 공생의 정신을 실천하며 살아 온 윤 의사의 삶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관장은 특히"윤 의사의 의거를 테러로 보는 것은 무지의 소치"라고 지적했다. 그는 "윤 의사는 민간인이 아닌 임시정부 특무대 소속 특수부대원 신분으로 의거를 했다"며 "윤 의사에 대한 판결문에서도 훙커우 공원을 전장으로, 윤 의사를 적국의 특무대원으로 표현했으며 민간인과 달리 단심인 군사재판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장제스(蔣介石) 전 대만 총통도 윤 의사의 의거를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평가했을 정도"라며 "그의 용기있는 행동은 일제 침략으로 고통받던 아시아인들의 염원을 대변한 행위였다"고 덧붙였다.

윤 의사는 독립운동가이기 이전에 인문학자이자 계몽운동가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윤 의사는 고향인 충남 예산에 남긴 한시(漢詩)만 100여편이 넘을 정도"라며 "19세 나이로 농촌 계몽운동에 헌신하던 중 일제의 감시로 활동에 제약을 받자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당시 윤 의사는 '사나이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뜻을 이루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심장한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란 유서를 남겨두고 상하이 임시정부로 향했다고 한다.

윤 관장은 "보통 독립운동가라고 하면 가난한 생활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윤 의사와 김좌진 장군 등 여러 독립운동가들은 부유한 집안 출신"이라면서"하지만 독립운동에 나선 뒤 일제의 탄압을 받고 집안이 몰락해 후손들은 어렵게 살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윤 의사의 의로운 삶을 후대에 알리기 위해 40여년째 기념 사업을 하고 있는 그는 "안락한 삶을 뒤로 하고 독립에 자신의 목숨을 받친 윤 의사의 삶을 기억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성택기자 highn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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