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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12월 19일] '기형어(畸形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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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12월 19일] '기형어(畸形語)'

입력
2013.12.18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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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시를 먹고 남은 씨를 땅에 묻어 싹이 튼 감나무에는 작은 감이 달린다. 몇 번만 이를 반복하면 감이 점점 작아져서 나중에는 고욤과 비슷해진다. 사과나 배 등 다른 과일도 대개 그렇다. 과수의 이런 퇴화는 그나마 접목이라는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행을 가로막을 수 있다. 반면 말의 퇴화나 악성 돌연변이의 확산은 사용 빈도가 큰 일상어일수록 좀처럼 쐐기를 박기 어렵다. 편의점이나 음식점에서 쓰기 시작한 "오천 원이세요"는 벌써 꽤 널리 퍼졌다.

■ 고객 존중 방침에 따라 '시'를 붙인 말을 기계적으로 쓰다가 지나쳐 문법 틀을 깨버린 대표적 과용 사례다. 존경어미 '시'는 동사나 형용사의 어간 뒤에 붙든, 서술격조사 '다'와 '이다'의 '다'앞에 붙든 한결같이 주어에 대한 존경을 나타낸다. 따라서 "오천원이세요"는 생략된 주어인 '값'에 대한 존경을 표할 뿐이다. 정말 고객을 주어로 삼았다면, "당신은 오천 원짜리입니다"라는 말이 되고 만다. 그냥 "오천원입니다"라고 하면 그만이다.

■ 한결 거북한 말도 태어났다. 백화점이나 병원의 안내데스크에서 "오천원이세요"의 형제 뻘인 "왼쪽이세요"란 말이 들리더니 어느새 "왼쪽으로 가시겠습니다"라는 사촌까지 등장했다. 존경어미 '시'와 화자의 의지나 추측을 나타내는 어미 '겠', 화자 자신을 낮추는 어미 '습니다'를 한데 버무렸다. "왼쪽으로 가세요", "왼쪽으로 가십시오"라고 말하면 될 것을, 외국어도 아닌 우리말을 억지로 비틀어 짜느라 겪었을 마음 고생이 딱하고 안타깝다.

■ 최근 자주 들은 "조심히 오세요"도 귀에 설다. 표준국어대사전이 '조심조심'과 함께 '조심히'도 표준어로 인정하고 있지만, 형용사와 동사를 구분하지 않고 '조용하다→조용히'처럼 '조심하다→조심히'를 끌어낸 과거의 돌연변이가 그대로 굳어진 말이다. 현재는 '조심해서'라는 말이 훨씬 익숙하고 자연스럽다. 이런 돌연변이가 잇따르다가는 자칫 "(돈을) 가늠히 써라", "나날이 아름답는 여자" 등의 기형어가 나올지도 모른다. 우리말 바다에 더는 기형어를 풀지 말자.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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