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해, 참 억세고 세차게 달려왔다. 이제 조금 쉬어갈 때다. 뒤 돌아보며 숨 고르고, 일상에 복잡하게 찍힌 발자국들도 정리해보자는 이야기다. 충남 아산은 이맘때 다녀오기 딱 좋은 고장이다. 성탄절과 어울리는 예쁜 성당이 있고, 세밑에 달뜬 마음 눌러줄 고요한 소나무 숲길이 있다. 들르는 곳마다 사위가 한갓지니, 해넘이, 해돋이로 흥성거릴 여느 여행지와 분위기가 딴판이다. 끝이 아니다. 황량한 겨울 들판 한가운데, 계절과 무관한 온실꽃밭이 펼쳐진다. 순박한 사람들 살 붙이고 사는 초가도 구경하고, 온천에 몸 담갔다 일어서면, 지난 한 해 묵은 앙금 떨어지고, 다시 한 해 버틸 힘 생긴다. 서울에서 멀지도 않다. 길 잘 뚫리면, 고속도로 타고 1시간여면 닿는다.
●동화 속 그림 같은 공세리성당
공세리성당 찾아가는 길, 눈 내린다. 겨울의 그늘 드리워 회색이던 세상이 금방 하얗게 변한다. 하얀 세상을 눈으로 보니, 마음도 순백이다. 이런 마음으로 사방 둘러보니, 천지에 사랑하지 못할 것이 없다.
공세리성당은 인주면 공세리 야트막한 언덕에 있다. 서해안고속도로 서평택IC로 나와 아산만 방조제 건너 닿는 땅이 공세리다. 아산만 방조제는 경기도 평택과 아산을 연결한다. 성당 뒤편에선 나뭇가지 사이로 아산만 일대가 보인다. 성당 자리는 원래 조선시대 조세 창고였다.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일대에서 거둬들인 조세가 여기에 모였다. 1895년 프랑스 출신 드비즈 신부가 이 창고를 성당으로 사용했다. 그러다 지금의 형태로 개축한 것이 1922년의 일이다. 붉은 벽돌, 고딕양식의 본당 건물에 묵직한 시간의 깊이 묻어난다. 유럽에선 이름난 성당이 훌륭한 볼거리다. 공세리성당도 일부러 짬을 내 찾아가는 수고가 아깝지 않을 만큼 우아하다. 영화, 드라마에도 많이 나왔다. 눈 내리니 본당 앞 팽나무에 눈꽃 활짝 핀다.
공세리성당은 천주교 신자들에게 성지다. 한국 천주교회는 4대 박해(신유ㆍ기해ㆍ병오ㆍ병인)를 겪으며 1만 여명의 순교자를 낳았다. 이들 대부분은 충남 아산, 서산, 당진, 홍성, 예산 등 내포지방에서 나왔다. 내포지방은 일찌감치 중국과 교역이 활발했다. 천주교의 전례도 빨랐다. 아산 출신 순교자가 32명. 성당에는 이들을 기리는 비와 탑이 있다. 사제관 앞마당에 느티나무 한 그루 우람하다. 나무 아래 벤치에서 숨 한 번 고른다.
성당 뒤 ‘십자가의 길’은 걸어봐야 한다. 예수의 수난과 죽음이 14개의 조형물로 만들어졌다. 하나하나 표정과 동작이 속세의 일상처럼 생생하다. 지난 삶 돌아보게 만드는, 돈 주고도 못살 ‘작품’들이다. 허물 많으니 십자가 유독 커다랗게 보인다. 이 허물 보듬듯 하얀 눈이 십자가에 소복하다.
●비밀스런 사색의 공간 …봉곡사 소나무숲길
아산에는 고즈넉한 숲길이 있다. 봉곡사 소나무숲길이다. 성당 이야기 뒤에 느닷없이 절집이냐고 물을지 모를 일이다. 천주교나 불교나 이들이 전하는 ‘사랑’의 메시지는 매한가지. 가슴 속에 뜨거운 사랑 품었다면 성당이든, 절집이든 대수일까 싶다.
숲길은 송악면 유곡리 봉수산 중턱에 있다. 봉곡사 드는 길이다. 주차장에서 시작된 약 1km 구간이다. 공세리성당에서 국도 39호선 타고 아산시내 지난 후 국도 21호선타고 송악방면으로 가면 닿는다.
숲길을 걷는다. 바람 상쾌하니 몸이 개운하고, 새소리 맑으니 귀가 즐겁다. 울창한 소나무마다 눈을 한가득 이고 있다. 나무의 몸체는 우람하지 않지만, 제멋대로 휘어진 모양이 일품이다. 게다가 사위가 어찌나 고요한지 동전 떨어뜨리면 그 소리 쩌렁쩌렁 울릴 정도다. 바람 불어 쌓인 눈이 허공에 흩어지면 딴 세상 펼쳐진다.
숲길 끝에 봉곡사가 있다. 돌축대 쌓고 지은 절집이 단출하다. 양지바른 곳에 서 너 채의 가람이 다소곳이 자리잡았다. 봉곡사는 충남 공주 마곡사의 말사다. 신라 진성여왕 때(887년) 도선국사가 창건하고, 조선 말 고승인 만공스님이 도를 깨우친 절이라고 전한다. 절집 들머리에 만공탑도 있다. 대웅전의 단청이 곱다. 또 단청이 없는 고방(庫房)은 처마에 달린 고드름처럼 맑고 담백하다.
공세리성당에서 봉곡사까지 이어진 도로는 송악면 외암리를 지난다. 그 유명한 외암민속마을이 있으니 들려도 좋다. 원래 예안 이씨 집성촌으로 500여년 전부터 형성된 전통 부락이다. 보기에는 경기도 용인의 한국민속촌과 비슷하지만, 실제로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이 다르다. 참판댁, 병사댁, 감찰댁 등 택호가 정해져 있는데, 참판댁은 조선시대 이조참판을 지낸 퇴호 이정렬이 살던 집으로 고종황제가 하사한 현판이 걸렸다. 병사댁은 홍경래 난을 진압한 이용현이 살았던 집이다. 눈 내린 마을 풍경 참 푸근하다.
●겨울에 만나는 화사한 꽃밭…세계꽃식물원
봉곡사에서 국도 21호선 따라 온양온천역 방향으로 가면 도고면 봉농리 세계꽃식물원이다. 이곳은 365일 꽃 피는 곳이다. 칼바람 불고 눈 펑펑 쏟아져도, 온실 안 식물들은 싱싱하다.
안보이면 더 보고 싶고, 마음 간절해지면, 훨씬 더 예뻐 보인다. 한 겨울 꽃이 그렇다. 겨울에 꽃 보면 제철과 느낌이 딴판이다. 꽃은 같은데, 색깔이 더 선명하고, 나무들도 훨씬 더 싱그럽다. 온실의 온기까지 더해지니 눈이 즐겁고, 한파에 얼어붙은 마음도 스르륵 놓는다. 식물원은 약 20년 전 화훼 수출 생산단지로 출발했다. 약 10년 전에 3,000여종의 식물을 구경할 수 있는 식물원으로 개관했다. 유리온실 규모(2만8,000㎡)가 어마어마해 입소문 많이 탔다.
각각의 온실이 다양한 테마에 맞춰 꾸며졌다. 이 중에 카페 앞에 조성된 ‘꽃터널’이 지금 가장 화사하다. 빨간 꽃 심어진 화분이 천장에 나무열매처럼 주렁주렁 달렸다. 온실은 바깥세상과 단절된, 비밀스럽고 꿈같은 장소다. 이곳에선 시간의 질서가 완전히 무너진다. 겨울이 본격 시작되기도 전에 봄이 먼저 와버렸다.
입장료는 어른 8,000원, 초등학생 6,000원. 입장료 영수증에는 화분교환권이 붙어있다. 이것을 매표소에 제출하면 아이 손바닥만한 식물화분을 내어준다. 식물원은 농지 한 가운데 있다. 들어선 모양새가 덩그렇지만, 실내는 한겨울 꽃구경하기에 모자람 없다.
●한 해 피로 ‘보양온천’으로…파라다이스 스파 도고
겨울에는 온천이 제격이다. 특히 노천에서 즐기는 온천욕이 최고다. 노천탕에 딱 10분만 몸 담그고 있으면 기분 좋은 나른함에 피로가 말끔하게 씻긴다.
아산은 ‘온천도시’다. 유서 깊은 온양온천, 도고온천이 있고 현대에 개발된 아산온천도 제법 입소문 타고 있다. 온양온천은 조선 태조를 비롯해 여러 왕들이 즐겨 찾을 만큼 명성 자자했다. 도고온천도 신라 때부터 약수온천으로 이름 날렸다.
세계꽃식물원에서 645번 지방도 타고 신언리에서 우회전, 도고면사무소 지나면 선장면 신성리(옛 도고면 기곡리) 도고온천지역이다. 여기에 위치한 파라다이스 스파 도고는 아이가 있는 가족단위 방문객이 좋아하는 온천시설로 익히 유명하다. 아이의 움직임이 한 눈에 들어오는, 탁 트인 실내구조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알콩달콩 즐길 거리도 제법 있다. 이곳 야외 유수풀, 야외 노천 테마탕은 겨울에도 운영한다.
이곳 온천은 안전행정부가 지정한 보양온천이다. 보양온천은 지정 기준이 일반온천에 비해 까다롭다. 성분에 관계없이 용출온도가 섭씨 25도 이상이면 일반온천으로 지정되지만 보양온천은 용출온도가 섭씨 35도 이상이어야 한다. 35도 이하일 경우 의학적 효능이 우수한 광물질이 풍부해야 보양온천이 될 수 있다. 내부시설 기준도 엄격하다. 온천 참 많지만, 보양온천은 전국에 채 10개가 안 된다.
파라다이스 스파 도고에는 캐러밴 캠핑장도 조성돼 있다. 하얀 눈 내린 겨울, 캐러밴에서 보내는 하룻밤은 색다른 추억으로 남는다.
고즈넉한 성당과 숲길, 꽃밭과 초가가 있는 아산, 성탄 들머리에 다녀오면 좋을 곳이다.
●여행메모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 서평택IC로 나와 아산만 방조제 건너면 공세리성당(041-533-8181). 여기서 국도 39호선 타고 아산 시내 지난 후 국도 21호선 송악방면으로 가면 외암리 지나 봉곡사까지 갈 수 있다. 다시 국도 21호선 타고 온양온천역 방향으로 가면 도고면 봉농리 세계꽃식물원(041-544-0746), 여기서 645번 지방도 타고 신언리에서 우회전, 도고면사무소 지나면 파라다이스 스파 도고(041-537-7100)가 있는 도고온천지역이다. 파라다이스 도고 입장료는 대인 주중 3만5,000원, 주말 4만원, 소인 주중 2만6,000원, 주말 3만2,000원이다. 나이트스파(오후 6시 이후 입장)는 모두 1만5,000원이다. 캐러밴 이용요금은 4인 기준 1박 주중(월~목) 13만2,000원, 주말 22만원부터다. 아산시청 문화관광과 (041)540-2631
▲먹거리: 외암민속마을 앞에 위치한 외암촌(041-543-4150)의 사골떡국(7,000원)과 잔치국수(5,000원)는 여행 중 요기하기 괜찮다. 음식 맛 담백하고 깔끔하다. 서울에서 전철 타고 일부러 찾는 어르신들 많다.
▲성탄절 가볼만한 예쁜 성당들: 강원도 횡성 풍수원성당(1907)은 한국인 신부가 지은 최초의 성당이다. 고색창연한 고딕양식 건물이 아름답다. 야트막한 뒷산에 소나무 숲길 따라 오르는 ‘십자가의 길’이 운치가 있다.
전북 익산 나바위성당(1907)은 고딕양식과 한옥양식이 어우러진 외관이 독특하다. 고딕양식의 첨탑이 있고 지붕에 기와를 얹었으며 고궁에서 볼 수 있을 법한 회랑까지 갖췄다. 이런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은 국내에서 유일하다.
전북 전주의 전동성당(1914)은 호남지방 근대건축물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것 중 하나다. 고딕양식에 로마네스크, 비잔틴양식이 가미된 종탑이 아름답다.
아산=글ㆍ사진 김성환기자
한국스포츠 김성환기자 spam001@hksp.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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