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범람하는 시대에 종이책을 읽으라고 권하는 것은 다소 촌티나는 감이 있다. 더구나 첨단 미디어를 연구하는 학자가 그런 소리를 한다는 건 의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종이책을 권하길 멈추지 않는 건 독서가 주는 여러 가지 장점 때문이다.
첫째, 종이책에는 '여백'이 있다. 종이위에 글씨나 삽화가 얹힌 책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3D 영화는 과도한 '실재감' 때문에 우리가 잠시라도 다른 생각을 하거나 상상을 할 여유를 좀처럼 주지 않는다. 그러나 종이책을 읽을 때면 우리는 마음대로 페이스 조절을 하며 상상을 할 수 있다.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에 관한 책을 읽으며 내가 백설공주와 대화를 하는 장면, 백설공주와 함께 시장에 나갔다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환호를 받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종이책을 읽을 때는 한가지 스토리에 집중할 수 있다. 인터넷 문서를 읽을 때면 우리는 많은 단어들에 '하이퍼링크'라 불리는 밑줄이 그어져 있음을 발견한다. 내가 잘 모르거나 궁금한 단어에 밑줄이 그어져 있을 땐 얼른 클릭해서 그 단어의 뜻이나 연관 정보를 검색할 수 있지만, 때로는 클릭에 클릭을 거듭하다가 원래 텍스트로 돌아오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최근에는 링크가 제공하는 정보가치보다 링크 때문에 본래 읽던 책의 줄거리를 놓치고 지적인 '방황'을 하는데 드는 비용이 더 큰 경우도 있다는 비판이 고개를 들고 있다. 니콜라스 카의 이라는 책이 바로 그런 문제제기의 좋은 예다.
셋째, 종이책을 통해 스토리에 집중하는 훈련은 훌륭한 스토리텔러가 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인터넷에 주로 의존하는 세대가 기존 세대와 다른 점은 바로 '희귀어'의 사용에 있다고 한다. 여기서 '희귀어'란 사람들이 사용하는 빈도를 기준으로 상위 1만단어 밖에 있는 단어들을 말한다. 이런 희귀어들은 사람들이 스토리텔링을 할 때 수식어나 의미를 풍부하게 해주는 단어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 세대는 종이책을 주로 읽던 세대에 비해 이런 '희귀어'의 활용에 능숙하지 못하다. 단어 활용이 제한되어 말과 글이 단조롭기 십상이다. 만약 당신의 자녀를 훌륭한 스토리텔러로 키우고 싶다면 인터넷도 좋지만, 많은 책을 읽히는 게 더 나은 길일 것이다.
참고로 요즘 유행하는 전자책을 읽을 땐 꼭 종이 한 장에 내용을 요약하거나 기억하고 싶은 문장을 적어가면서 읽기를 권하고 싶다. 전자책의 가장 큰 장점은 휴대성이다. 권당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대학교재를 모두 배낭에 넣어 다닌다면 얼마나 무거울까. 전자책이라면 단 한 권이나 수십 권이나 무게는 똑같다. 그런데, 우리가 서점에서 종이책을 집어들고 '후루룩' 넘기며 볼 때 느끼는 직관적 통찰이나 '아하!'하는 발견의 순간을 전자책에서 얻기가 쉽지 않다. 또한 전자책에서 제공하는 여러 가지 하이퍼링크를 클릭하다 보면 본래 줄거리에서 한참 벗어나기 쉽다. 따라서 자신이 이해한 줄거리의 대강을 직접 그림으로 그리거나 요약하며 읽는다면 책의 내용을 내 것으로 만들기가 훨씬 용이할 것이다.
미국에 있을 때,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딸아이가 한 해 읽었던 책이 무려 400여권이었다. 같은 반에는 내 아이보다 무려 50여권을 더 읽은 아이도 있었다. 학교에서는 매일 독서기록(reading log)을 쓰도록 지도했고, 학년말에는 아이들이 읽은 책의 권수와 책의 질을 모두 고려해서 상을 주었다. 단 1 달러짜리 책부터 100달러, 200달러짜리 책까지 다양한 선택이 있었던 나라. 너무 비싸서 사지 못한 책들도 기다리면 파격세일을 했던 나라. '반스 앤 노블'같은 서점에 가보면 가벼운 신변잡기부터 세계사를 기발하게 정리해낸 화보집까지 입을 벌어지게 엄청난 지식이 쌓여있는 나라. 내게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다가왔던 것은 첨단 무기가 아니라 압도적인 책의 다양성 때문이었다. 연말에 몸도 마음도 바쁘겠지만, 책장에 오래도록 꼽혀있는 책을 꺼내 드는 당신의 손이야 말로 가장 아름답다고 믿는다.
김장현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융복합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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