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요 '어린 음악대'에서 '따따따 나팔 붑니다'로 표현되는 트롬본. 이 악기를 실물로 처음 본 열한 살 소녀는 그 찬란한 금빛에 넋을 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녀는 트롬본과 한 몸인 듯 연주법을 알려주지 않아도 곧잘 연주했다. 빌린 악기로 연습하고 고액 과외는 꿈도 못 꿨지만 소녀는 최근 서울대 음대 기악과 수시전형에 당당하게 합격했다.
서울 신진자동차고 3학년 최슬기(18)양의 이야기다. 슬기양은 "한때 연주가의 꿈을 포기하고 취업할까 생각했지만 선생님들이 돈이 없어도 음악을 계속할 수 있다고 힘을 주셔서 다시 악기를 잡았다"고 했다. 슬기양은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가 이혼한 뒤 두 동생(당시 6, 4세)과 함께 보육시설인 서울후생원(서대문구 소재)에서 살고 있다. 슬기양은 "이제는 어머니 아버지 얼굴도 가물가물하다"고 말했다.
트롬본을 처음 잡은 건 초등학교 4학년이던 2006년. 후생원 아이들이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구세군 브라스밴드 지휘자의 추천이었다. 슬기양은 "트롬본은 음을 하나하나 낼 때마다 슬라이드를 정확한 위치로 움직여야 제대로 소리가 난다"고 했다. 생김새는 단순하지만 연주하기는 꽤 어렵다. 슬기양은 "그래서 더 재미있다"며 웃었다.
슬기양이 본격적으로 음악가의 길로 뛰어들게 된 건 신진자동차고 음악교사 천승현(38)씨 덕분이다. 천 교사는 2010년 구세군 90주년 기념 송년회에서 전문적인 지도를 받는 학생들도 내기 힘든 소리를 별 어려움 없이 내는 슬기양을 보고 깜짝 놀랐다. 천 교사는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바로 알아챌 정도로 슬기가 내는 음색이 탁월했다"고 말했다. 슬기양에게서 훌륭한 음악가로 성장할 수 있는 자질을 발견한 그는 신진고 진학을 권했고, 학교에도 슬기양을 추천했다. 이 학교는 방과후활동 특기적성 교육으로 관악부를 운영하는데, 악기와 연습실이 갖춰져 있어 슬기양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하자 주변에서도 도움이 이어졌다. 입시에 필요한 전공자용 악기는 실기시험을 석 달 앞둔 지난 8월 서울대 총동창회가 주최한 관악 콩쿠르에서 1등을 해 받은 상금으로 장만했다. 물론 중고다. 입시곡 연습은 서울시향 단원 제이슨 크리미씨가 도왔다. 크리미씨는 매달 한두 차례 구세군 브라스밴드를 가르치러 방문하다 슬기양의 사정을 듣고 매주 한 번씩 개인교습을 해줬다.
대학 합격 소감을 묻자 슬기양은 "좋아하는 음악을 계속 할 수 있어 기쁘다"면서도 "등록금이나 생활비 때문에 걱정이 많다"고 했다. 서대문구청과 삼성고른기회 장학재단 등이 슬기양의 등록금을 지원하겠다고 나섰지만 음악을 계속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천 교사는 슬기양을 돕기 위해 신진자동차고 총동문회와 학교 재단에 지원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음악적 재능을 더 키워주고 싶다"고 말했다.
슬기양은 "음악을 계속해서 연주가로 인정받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음악을 하고 싶어하는 아이들에게 레슨을 해주며 받은 도움을 되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안아람기자 onesho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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