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책은 시대의 산물이다. 물론 저자 혹은 작가의 노고가 으뜸이지만, 제아무리 뛰어난 작가라 하더라도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글을 쓸 수 없고, 당대를 뒤흔든 생각ㆍ사상ㆍ철학 등에 직ㆍ간접으로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과학적 발견이나 혁명의 도화선이 되는 등 세상을 바꾼 책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서적사가'로 불러도 손색이 없는 강창래의 은 평생 책만 천착한 '한 저자'의 오롯한 결과물이자 인류의 역사를 바꾸고 이끌어 온 수많은 책들이 주고받은 영향력을 정리한 책이다. 그는 '세상을 바꾼 책에 대한 소문과 진실'이라는 부제처럼 어제의 책이 오늘 우리와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은 "좋은 책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흔히 말하는 고전이 아닌, 예를 들면 포르노소설과 SF, 정치적인 중상과 비방을 담은 소설이 프랑스대혁명을 촉발시켰다고 저자는 말한다. 정치적 중상과 비방은 말할 것도 없고 SF 역시 "현재의 모순에 대한 비판과 간절한 바람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면서 표현하는 장르"이기에 당연히 "당시 사회에 대한 비판과 개혁 의지"가 담겨 있다. 그러나 포르노소설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들을 향해 저자는 장 자크 루소를 앞세운다.
서슬 퍼런 왕조 시대에 주권재민 사상을 담은 을 펴내 이단아가 되었던 루소지만 은 겨우 2쇄만 출간되었을 뿐이다. 반면 12세기 최대의 스캔들인 신학자 피에르 아벨라르와 제자 엘로이즈의 사랑을 생각나게 하는 연애소설 는 40년 동안 무려 115쇄를 찍었다. 당시 문맹률을 감안하면 글을 아는 사람은 죄다 읽은 게 라는 것이다. 루소뿐 아니다. 위대한 계몽사상가 볼테르도 라는 음란하고 외설적인 소설을 썼으며, 백과사전으로 유명한 디드로 역시 라는 풍자소설을 썼다. 디드로가 말한 보배는 '말하는 음문'(vagina)를 뜻한다.
"프랑스대혁명만이 아니라 '인권의 발명'에도 유명한 계몽사상가의 위대한 저작물은 없다. 대신 그 자리에 조금 음란한 연애소설들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대개 포르노그래피가 사회 질서를 문란케 하고 범죄를 유발한다고 생각하지만, 좀 더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긍정적 역할을 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위대한 고전들의 역할을 깡그리 무시하는 듯한 내용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지만, 일견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는 대목도 여럿이다.
저자가 주목한 두 번째 주제는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이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를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이자 역사상 가장 덜 팔린 책'으로 꼽는다. 초판 부수가 많아야 180권이었던 이 책은 "현대의 천문학자도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많다. 당연히 읽은 사람이 드물었는데, 갈릴레오조차 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당당히 과학혁명의 실마리가 되었는데, 요약본과 제자 레티쿠스가 쓴 해설서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갈릴레오도 뉴턴의 역할도 과대 포장된 면이 없지 않을 것이다. 과학혁명을 비롯한 모든 혁명은 소수 엘리트만의 공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가 하루하루 쌓여서 나온 결과인 셈이다.
날마다 책과 씨름하던 저자가 가진 또 다른 질문은 '고전은 정말 위대한가?'이다. 그의 칼끝에 놓인 것은 플라톤의 중 소크라테스와 공자의 다. 알다시피 소크라테스는 이렇다 할 저작, 아니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았다. 우리가 아는 소크라테스는 대개 플라톤이 증언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문제'가 발생한다. 결국 "소크라테스의 말이라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인 것 같기도 하다"는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너 자신을 알라"가 소크라테스의 말인지, 아니면 플라톤의 말인지 누구도 알 수 없다.
최근 새로운 관점에서 다양한 책들이 쏟아지고 있는 공자에 대해서도 저자는 '소크라테스의 문제'가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는 공자 사후인 춘추전국시대 어느 시점부터 쓰여졌고, 진시황 때는 분서갱유의 주요 대상이었다. 그나마 많지 않던 기록을 여러 사람이 모으고 모아서 낸 것이 로 "공자가 죽은 지 700년쯤 지난 뒤" 나온, 현재까지 전하는 다. "사회적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상상하기 힘들 만큼 원시적인 수준이었던 세월을 700년이나 지난 뒤"에 만들어진 가 "정말 공자의 어록일까?"
저자는 '한 인간을 결정하는 것이 본성인가 양육인가'에 대한 논쟁을 다룬 후 마지막으로 '책의 학살'에 대해 증언한다. '책의 학살'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리브리사이드(libricide)는 낯설지만 고대부터 내려오는 '전통'이었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태생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책은 늘 파괴의 대상이었다. "나의 지혜는 내 힘이지만 적의 지혜는 적의 힘"이기에 지배층은 책에 대해 이중적일 수밖에 없었다. 알렉산드리아도서관을 불태우고 필사본?목욕탕 연료로 썼던 오마르도 그랬고 진시황, 나치, 폴포트 등도 책의 학살에 앞장섰다. 따지고 보면 책만큼 기묘한 상품도 없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인쇄되고… 팔리고, …정정되고 검열되고 읽"히며 "게다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파괴"된다.
저자는 마지막에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덧붙인다. 도서관이 책 파괴의 현장이자 책의 감옥이 된다는 것이다. 인기가 많아 손을 많이 탄 책은 그만큼 빨리 파괴될 것이고, 인기가 없는 책들은 "도서관이라는 감옥"에서 사람의 손길을 기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책은 파괴의 역사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에둘러 보여주는 것이리라.
은 메타북, 즉 책에 대한 책이지만 단지 그만큼에서 멈추지 않는다. 책이란 무엇이며,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무엇인가, 그리고 책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사물이 아닌) 존재인가를 묻고 답한다는 점에서, 제목 그대로 '책의 정신'을 내포한 책이다. 다소 보수적인 관점에서 책과 혁명의 관계성을 다룬 몇몇 대목은 아쉽다. 하지만 인류 역사와 부침을 함께해 온 '책'이라는 존재의 정체성만큼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일독의 가치는 충분하다.
장동석ㆍ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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