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너 달 사이 문인들이 모이는 자리면 빠지지 않는 화제가 하나 있었다. 국내 최장수 문예지 얘기다. 9월호에 수록된 박근혜 대통령 수필 예찬론으로 곤욕을 치른 이 월간지에 자성의 기미를 기대했던 작가들은 이후 연달아 이어지는 일탈 사례에 깊은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연재를 계약했던 작가들의 작품을 정치적 이유를 들어 게재 거부했다는 얘기가 속속 전해지는가 하면 대통령 수필 수록에 대한 사과문을 싣자는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편집위원들이 사퇴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시작은 문제의 '박비어천가'가 수록된 9월호부터 연재가 중단된 서정인(77)씨의 장편소설 '바간의 꿈'이었다. 두 차례 연재 후 3회차 원고를 보낸 서씨는 편집자로부터 작품을 실을 수 없겠다는 일방적 통보를 받았다. 인물의 대사를 통해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판적으로 묘사한 대목이 정치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어 10월호부터 장편 연재를 시작하기로 한 소설가 정찬(60)씨에게도 연재 약속 파기 통보가 갔다. 연재 제안을 받고 1970~80년대 청춘을 보낸 두 남녀의 사랑을 그린 장편소설 1회분 원고를 보낸 정씨는 "은 정치적 색채를 드러내는 작품은 싣지 않는다"는 양숙진(65) 현대문학사 대표 겸 편집주간의 이메일을 받았다.
소설가 이제하(76)씨가 지난주 "내년 1월호부터 에 연재키로 한 소설을 컷 당했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면서 곪은 환부는 마침내 터졌다. 한국으로 귀화한 선교사의 삶을 다룬 장편 연재 1회분 원고에 "'박정희 유신'과 '87년 6월 항쟁'이라는 두 단어가 들어갔다"는 이유로 게재를 거부당한 것이다.
앞서 9월에는 '박비어천가'를 수록한 데 대한 사과문을 싣자는 편집위원들의 요구를 양 주간이 받아들이지 않아 시인인 김소연, 신해욱 두 편집위원이 사퇴하는 일도 있었다. 9월 이후 소설가 이순원, 시인 손택수 심보선 황인찬씨 등 에 원고 게재를 거부하거나 구독을 중단하는 작가들의 명단도 점점 길어지고 있다.
일련의 사건이 알려지면서 불똥은 정치권에까지 튀었다. 민주당은 13일 성명을 내고 "은 이것이 자체 검열인가, 외부 압력인가" 밝히라고 요구했다. 양 주간이 언론과 접촉을 피해 확언할 수는 없지만, 박 대통령 지지자인 양 주간의 독단과 전횡이라는 게 문학계의 중론이다. 1997년부터 을 맡아온 그는 박 대통령의 어린 시절에 깊은 연민을 갖고 있는 전형적인 60대 지지자라는 게 주변 설명이다.
사태는 느닷없이 70년대로 돌아간 것 같은 '유신 복고'의 사회적 분위기를 여실히 보여주는 실례이지만, 문학 쪽은 간단치 않은 사정이 하나 더 있다. 소위 말하는 문학의 위기다. 은 좋은 작가들을 수도 없이 배출해낸 매우 중요한 문예지이고, 그런 만큼 작가들 대부분이 이 잡지가 혹여라도 폐간될까 안타까움 속에서 마음을 졸이고 있다. "소중한 문예지가 자본주의 정치적 성향에 의해 훼손되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는 걱정은 소설 연재를 거부 당한 정찬씨의 말이다. 서정인씨는 한 발 더 나아가 "후견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선 문예지를 낼 수 없는 구조적 문제를 나무라야지 표현의 자유만 외치는 것도 아전인수 같다"고 말했다.
은 조만간 편집위원들의 의견을 모아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입장을 잡지에 공표할 입장이라고 밝혔다. 1월호는 제작이 상당 부분 진행돼 2월호에나 실릴 예정이다. 문학이 무엇인지도, 정치가 무엇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시대의 수구적 분위기에 편승해온 편집주간이 이 소중한 잡지의 전통을 훼손한 데 책임지고 편집 일선에서 물러나겠다는 획기적 내용이 실려 있기를 기대한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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