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은 등대지기가 되고 싶었다. 해 지면 등 켜고 해 뜨면 등 끄고, 때마다 밥도 주고 잘 곳도 내어주니 이보다 좋을 수 있을까? 욕망과 소음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열 발짝쯤 물러나 아무 것도 바꾸지 않고 무엇도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면서…그렇게 잠깐 들렀다 가듯이 살고 싶었다.
등대지기가 되는 데 실패한 그가 만난 건 사진이었다. 그는 사진이 마음에 들었지만 기록의 도구로 사용한 적은 없다. 퇴색하는 기억을 근근이 붙잡는 데 쓰기엔 사진의 가능성이 너무 컸다. 교정에 홀로 서 있는 나무가 평소와 다르게 보인 날 그는 대형 캔버스를 나무 뒤에 대고 사진을 찍었다. 아무 것도 바꾸지 않고 그저 "시공간의 어느 한 지점에 필름을 잠깐 넣었다 빼니" 하얀 캔버스 안에 나무가 담겼다. 자연이 그려준 그림이었다.
사진작가 이명호의 개인전이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12일 개막했다. 2004년부터 작업한 '나무' 연작과 '바다' 연작 15점이 '사진-행위 프로젝트: 밝은 방, 어두운 방'이라는 이름으로 걸렸다. 서른이 다 돼 늦깎이로 사진을 시작한 이씨는 국내보다 해외에서 먼저 알려졌다. 2008년 네덜란드의 한 예술잡지가 그의 나무 사진을 비중 있게 소개했고, 이어 뉴욕 요시밀로 갤러리가 그를 초대해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스위스, 이탈리아, 대만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가했고 10월에는 중국 798포토갤러리에서 한국 작가 중 처음으로 개인전을 가졌다.
캔버스 안에 들어간 이명호의 나무는 수많은 감상을 자아낸다. 누군가는 "주변 배경을 캔버스로 지워버림으로써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초현실적 나무를 재현했다"고 평했고, 또 다른 이는 "마르셀 뒤샹이 변기의 장소를 옮겨 샘으로 만든 것처럼 나무의 배경을 바꿔 나무가 아닌 다른 것으로 만들었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굳이 속뜻을 헤아리지 않더라도 그의 나무가 시선을 붙잡는 힘은 독보적이다. 희귀 수종도 고목도 아닌 흔한 나무, 아마 태어난 이래 단 한 번도 주인공이 돼보지 못했을 그런 나무가 흰 배경을 무대로 이파리 하나까지 완전하게 조명 받는 현장은, 평범한 삶에도 반드시 찾아오고야 마는 생의 결정적 순간을 훔쳐보는 듯한 기분이다.
나무로 이름을 알린 작가가 다음 행선지로 택한 곳은 사막이다. 몽골 고비사막, 이집트의 아라비아 사막, 러시아의 툰드라 초원 등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죽음의 땅에서 그는 바다를 만들었다. 재료는 다름 아닌 캔버스. 현지에서 동원된 수백 명이 바닥에 대형 캔버스를 펼치고 작가는 그 광경을 멀리서 찍었다. 사진 속 사막에는 멀리 바다 같은 것이 아스라이 넘실댄다. 바다가 아닌 신기루를 찍은 것 같다.
"캔버스를 이용한 작업을 평생 할 수 있을 만큼 생각해놨어요."
6일 만난 작가는 등대를 지키다 온 사람처럼 나른해 보였다. 캔버스를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예술이란 말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이 캔버스를 앞에 놓고 고민하는 작가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예술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시작한 캔버스 작업은 나무와 바다를 넘어 생의 결정적 순간을 기다리는 모든 것들을 향하고 있다. 몇 달 전 숭례문 뒤에 캔버스를 설치하려다가 안전상의 이유로 무산된 적이 있는 작가는 "다음엔 지구를 포장할까 생각 중"이라며 웃었다.
전시장에서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사막에서 캔버스를 펼치는 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한 작업 과정도 볼 수 있다. 전시는 내년 1월 5일까지 열린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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