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전역한 남모(23)씨의 허벅지에는 '주홍글씨'처럼 작은 화상 자국이 남아있다. 군에서 당한 가혹행위 탓이다. 지난해 6월 같은 소대 상병은 막 일병이 된 그를 불러내 "잦은 실수는 군기가 빠진 탓"이라며 불에 달군 숟가락과 열쇠를 허벅지와 엉덩이에 갖다 댔다. 선임병의 가혹행위를 보다 못한 동기가 소원수리를 넣었지만 부대 간부인 행정보급관은 "군 생활을 잘못하니 그런 것 아니냐"며 가해자 편을 들었다. 남씨는 고자질했다는 괘씸죄로 집단 따돌림을 당했다. 부대원들이 돌이나 나뭇가지를 던지기도 했다. 그는 "그때만 생각하면 괜히 의기소침해지고 자신감이 없어진다"고 했다.
훈련이나 규율에서 뒤처지는 사병에게 이 같은 얼차려를 주는 일은 우리 군대에서 드물지 않다. 개인 간 차이를 한 치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획일화한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곧 낙오자로 낙인 찍히고, 그에 대한 폭력이 정당화된다. 위 사례에서 보듯 폭력적 얼차려는 부대의 전력을 높이기 위한 '선의'로 통한다. 설사 이것을 선의라 쳐도, 결과가 그 의도를 따르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자살이나 총격 등 큰 사고로 이어지고, 그렇지 않다 해도 군의 비효율을 높일 수 있다.
상명하복이 만드는 비효율
규모는 작지만 강한 군대를 가졌다고 평가 받는 이스라엘은 그 비결로 사병 개개인의 '동기 부여'를 꼽았다.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만난 이스라엘 방위군(IDF) 노리 카플란 대위는 "상급자의 역할은 부하들이 임무를 완수하도록 동기를 부여해주는 것"이라며 "작은 목표라도 계속 성취한 사병은 자신감을 갖게 되고, 결과적으로 군도 보다 효율적으로 작전을 펼칠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 군은 이와 거리가 멀다. 일단 지시하고, 따르지 못하면 얼차려를 주는 식의 훈련이 일반적이다. 병사들의 의견이나 장단점 등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강원 홍천에서 근무한 예비역 병장 박모(32)씨는 "주특기 훈련 도중 선임병이 박격포 포신에 파인 홈이 몇 개냐고 묻기에 즉각 답하지 못했더니 연병장을 돌라고 시킨 적이 있다"며 "박격포를 쏘는 데 전혀 상관이 없고, 교본에도 없는 건데 왜 얼차려를 받아야 하는지 울분이 터졌다"고 말했다.
배려해야 할 질환이나 장애조차 간과해 한 사람의 인생에 트라우마를 남기기도 한다. 지난해 1월 전역한 김모(24)씨는 "군 생활이 빨리 끝나길 단 하루도 빌지 않은 적이 없다"고 했다. 틱 장애를 갖고 있는 그에게 부여된 주특기는 지상감시였다. 최전방 초소(GOP)에 배치됐지만 김씨는 적응하지 못했다. 틱 장애로 이상한 소리를 낼 때마다 선임들은 욕한다며 괴롭혔다. 견디다 못해 관물대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치는 자학행위까지 하게 됐다. 결국 통신병으로 보직을 바꿨지만, 심리적 고통은 잊히지 않았다. 그는 "주특기 심사 때부터 틱 장애를 고려해 배치했다면 군 생활이 그렇게 힘들진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불합리한 명령이라도 무조건 복종하라는 강요는 상관에게는 편리한 규칙일수 있지만 결코 조직의 효율성을 높이지는 못한다. 병장으로 제대한 양모(32)씨는 "소대의 고문관에게 선임병들이 정신을 번쩍 들게 해주겠다며 방독면을 쓰고 잠을 자게 했지만 그 병사는 상병이 돼서도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통신병 임무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까라면 까라' '안되면 되게 하라'는 식의 상명하복에 익숙해진 이들은 전역 후 사회 조직에서 이런 문화를 재생산한다.
사회와의 단절이 군 병폐 키워
특히 심각한 사회와의 단절은 획일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우리의 군대 문화를 더욱 견고하게 하는 요인 중 하나다. 우리보다 복무기간이 긴(36개월) 이스라엘은 주말마다 외박이 가능하고, 사병도 휴대전화를 쓸 수 있다. 선글라스를 쓰거나 귀걸이를 한 병사를 보는 일도 예사다. 불필요한 것을 강요하지 않는 게 이스라엘 군대 문화이기 때문이다. 스위스는 평소 생업을 유지하다 1년 중 19일만 군에서 훈련을 받는 민병제를 운영하지만 훈련기간 중에도 주말마다 밖으로 나올 수 있다. 일과 후 맥주도 두 캔까지 허용된다.
반면 우리 군은 입대 후 최소 몇 주 동안 외박이나 면회 없이 집단생활을 하면서 마치 '외딴 섬'처럼 사회와 고립된 생활을 한다. 명령이 불합리해도 피할 곳이 없고, 부대 내에서 문제를 발견해도 알릴 방법이 없다. 차라리 체념하고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군대에서 살아남는 길이다. 김병조 국방대 교수는 "군이 사회 속에 자리 잡은 해외 징병제 국가와 달리 우리는 격리돼 있다"며 "사회와 교류가 없는 조직에서의 규율은 위계적이고 폭력적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보니 고질적인 구타ㆍ가혹행위도 근절되지 않는다. 군인권센터가 지난해 11월 병사 350명 대상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가혹행위를 당한 병사가 12.5%로,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 조사(9.6%)보다 2.9%포인트 증가했다. 가혹행위 목격 경험 비율도 22%를 기록, 2005년 10.4%보다 크게 늘었다.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은 "전시(戰時)에 이 사람이 나를 지켜준다고 생각하면 구타ㆍ가혹행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위계적인 상명하복 문화가 상호신뢰가 밑바탕인 전우애마저 갉아먹고 있다"고 말했다.
의무만 남은 청춘의 감옥
병역의 의무인 군에서의 21개월은 고스란히 낭비하는 세월이 되고 만다. 정비사는 정비병으로, 요리사는 취사병으로 배치하는 스위스와는 달리 군의 소요(所要)에 따라 배정받은 주특기는 경력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저 '청춘을 저당 잡힌 시간'일 뿐이다.
군 복무에 대한 보상이 적다는 점도 '시간을 때운다'는 인식을 키운다. 월급(상병 기준 11만7,000원)만 봐도 같은 징병제 국가인 대만(28만원), 이스라엘(43만원)의 25~40%에 불과하다. 세금 감면 등 혜택을 주는 이들 국가와 달리 전역자에게 아무런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점도 상대적 박탈감을 키운다.
충남대 국방연구소의 '2011년 병역이행 설문조사'에서 전체 응답자 668명 중 37.8%가 병역이행이 자랑스러운 이유를 '국가의 보상과 사회적 존경심은 낮으나 개인적 자부심이 높아서'라고 꼽은 것도 우리 징병제의 현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스위스 툰에 위치한 전차포병학교에서 만난 니콜라스 웨버 대령은 "징병제라도 의무만 강조하면 병사들의 반발을 사 결과적으로 작전수행능력을 떨어트린다"고 말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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