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이사를 하는 날이었다. 위성안테나를 떼기 위해 사다리를 놓고 옥탑지붕으로 올라갔다. 사다리를 잡아주던 주인아줌마는 전화벨소리를 듣고 살림집으로 내려갔다. 사다리를 걸쳐놓은 옥탑지붕과 옥상바닥은 미끄러웠다. 간신히 사다리에 한 쪽 발을 내디뎠을 때였다. 사다리가 휘청거리며 한 쪽으로 쏠렸다. 나는 사다리와 함께 옥상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어디를 어떻게 다쳤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일어나려고 바닥에 손을 짚었지만 힘을 쓸 수 없었다. 간신히 핸드폰을 꺼내들었는데 번호를 누를 힘이 없었다.
숨을 쉴 때마다 통증이 밀려왔다. 나 혼자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모든 게 순식간에 바뀌어 있었다. 위성안테나 같은 건 버리고 갈 걸 그랬다. 내가 왜 위성안테나를 떼러 옥탑옥상에 올라갔다는 말인가. 옥탑옥상에 올라갔을 때 내려오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20초 전, 21초 전, 22초 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아줌마는 한참 만에 옥상으로 올라왔다. 쓰러져있는 나를 부축해주었다. "떨어진 거예요?", "조심하지 않고 어쩌다가…" 아줌마는 부축해 줄 테니 일어나보라고 했다. 나는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그때서야 아줌마는 119구급차를 부르러 내려갔다. 구급대원은 발가락을 움직여보라고 했다. 다행히 신경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했다. 맨발로 구급대원의 등에 업혔다.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가고 있었다. 미동에도 허리가 아팠다. 허리가 아픈 만큼 몸이 굳었다. 응급실까지 데려온 구급대원에게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통증을 참기에도 버거웠다. 윙크라도 해주고 싶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있었다. 나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서야 긴 윙크를 할 수 있었다.
C․T 촬영을 했다. 내가 공상이나 떨고 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현재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나. 내 아픔을 온전히 나 혼자서 책임져야 할 때가 되어서야 그것을 알았다. 나는 얼마나 관념적으로 아팠나, 나는 또 얼마나 엄살을 피웠나. 그동안 내가 누렸던 행복은 모두가 거짓이었다. 나는 하루하루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살았다. 내 몸을 가눌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그걸 알았다.
나에게는 8주 진단이 내려졌다. 충격으로 허리 뼈 하나가 주저앉았지만 다행히 신경을 건드리지 않아 마비가 오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의사는 60일에서 70일 정도 보조기를 차고 있으면 정상이 될 거리고 했다. 그래도 1년 정도는 무리한 힘을 쓰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60일, 70일이 언제 지나갈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혼자서는 몸을 뒤집을 수도 없었다. 밥도 먹을 수 없었다. 화장실을 가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나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눈을 뜨고 눈을 감는 것조차 힘겨웠다. TV를 켜놓고 화면을 우러러보는 고참 환자들이 부러웠다. 밥이 나오면 밥을 먹고 링거 병을 거치대에 걸고 산책을 나가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필요한 것을 가져다달라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진통제를 맞아도 통증은 물러가지 않았다. 이불을 머리끝으로 끌어올릴 수도 없으니 마음 놓고 울 수도 없었다. 새벽에 복도를 오가는 발자국소리, 엔진소리 요란하게 질주하는 자동차소리, 오토바이소리, 옆자리에서 숨 쉬는 소리 하나까지 통증을 불러오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은 내가 아프지 않았을 때에는 나와는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고통의 시간을 재듯 링거액이 떨어지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어둠 속에서 링거액이 떨어지는 수를 세다 잠이 들었다. 다시는 이 병실에서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60일이 지나고 70일이 지나서 깨어나게 해달라고 꿈속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보조기를 차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내가 걷는 것이 신기해서 눈물이 나왔다.
이윤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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