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은행들의 자기자본 투자를 금지하는 볼커룰이 승인됐다. 제안자인 폴 볼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 의장의 이름을 딴 이 규정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제정된 미국 금융개혁법(도드-프랭크법)의 핵심 조항이다. 월가의 반대 로비를 뚫고 초안 발표 2년여 만에 볼커룰이 승인되자 뉴욕타임스(NYT)는 "오바마 정부의 위험투자 억제 노력의 상징", 파이낸셜타임스(FT)는 "금융위기 재발 방지를 위한 새로운 세계 질서"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연준, 연방예금보험공사, 통화감독청, 증권거래위원회, 상품선물거래위원회 등 5개 미국 금융당국은 10일(현지시간) 기관별 회의를 열어 볼커룰을 승인했다. 새 규정은 내년 4월 1일 발효된 뒤 1년 이상 유예기간을 거쳐 2015년 7월 21일부터 적용된다.
볼커룰의 핵심은 자기자본거래의 원칙적 금지다. 은행이 자기자본이나 차입금으로 주식, 채권, 파생상품 등 손실 우려가 있는 자산에 투자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은행의 사모펀드(헤지펀드) 투자나 소유도 제한된다. 은행이 대출 등 고유 업무가 아닌 고위험 증권거래를 못하도록 조치한 것으로, 1930년대 미국 대공황의 대책으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업무를 분리했던 글래스-스티걸법의 부활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시장조성(기업공개시 투자자 보호를 위해 일정기간 주가하락을 막는 것) 등을 위한 일부 자기자본거래는 예외로 인정했다. 은행은 볼커룰 준수 여부를 점검할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하고 최고경영자는 매년 프로그램 이행 사실을 금융당국에 보고해야 한다. 특히 JP모건체이스, 뱅크오브아메리카, 씨티은행 등 자산 500억달러(52조5,500억원) 이상의 대형 은행은 규정 시행 이전인 내년 6월까지 보고서를 내야 한다.
볼커룰은 도드-프랭크법 발효 이듬해인 2011년 10월 초안이 완성됐지만 월가와 당국, 당국 내 강온파의 팽팽한 힘겨루기로 난항을 겪어왔다. 은행들은 금융산업이 위축될 수 있고 고객 자산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유동성 차질을 빚을 수 있다며 규제에 반대해왔다. 그러나 지난해 2월 미국 최대 은행 JP모건의 런던 지사에서 60억달러의 파생상품 거래 손실을 낸 이른바 '런던 고래' 사건이 터진 데 이어 올해 2월 취임한 제이컵 루 재무장관이 강력하게 볼커룰 시행을 추진하면서 은행 규제론으로 균형추가 기울었다. NYT는 "초안에 없던 CEO의 규정 이행사항 의무보고 조항이 포함되는 등 월가보다 강경파 관료들의 견해가 많이 반영됐다"고 분석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우리 금융시스템은 더욱 안전해졌다"며 볼커룰 승인을 환영했다. 볼커도 "상당히 만족스러운 결과"라고 평가했다.
미국이 사실상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분리하는 방식으로 대형은행 도산 방지책을 마련하면서 글로벌 금융산업에도 상당한 파장이 예상된다. 미국 은행 중에는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등 자기자본거래 비율이 높은 은행들이 타격을 입을 전망이다. 볼커룰은 미국에 본사를 둔 은행뿐 아니라 미국에 법인이나 지점을 둔 해외 은행에도 적용되므로 미국에 진출한 국내 은행들도 영향권에 든다. 한편에서는 볼커룰 적용 기간을 유예시킨 월가가 대정부 소송 등으로 규정 무력화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시장조성 등 볼커룰 적용 예외 조항들이 실제 자기자본거래와 쉽게 구분되지 않아 실효성이 의심된다는 지적도 있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