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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유 기업은행 유통단지점 지점장>

입력
2013.12.11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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봇도랑에서 인생을 보여주신 아버지

나는 논농사만 100마지기 이상 짓던 부농의 5대 장손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7년~8년 전부터 내 이름을 놓고 고심하셨다. 그래서 지은 이름이 보배 진(珍)에 노적 유(庾)였다. 풀이하면 보배가 곡식단처럼 쌓였다는 뜻인데, 내가 은행에 들어오게 된 것이 이름 때문이 아닌가 싶다.

# 봇도랑을 가리키며 “뭐가 보이느냐?”

아버지는 다소 독특한 교육을 하셨다. 여행을 통해 넓은 세상을 보는 법을 가르쳤고, 두 번째는 선문답 같은 질문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깊이 있게 통찰하는 눈을 길러주셨다.

창원이 고향인 나는 당시 7시간에 걸쳐 대구까지 놀러오기도 했고, 아버지와 단 둘이 밤낚시도 다녔다.

세밀하고 깊이 있는 시선은 늘 선문답 같았다. 길을 가다가, 밥을 먹다가, 일을 하다가 문득 “이것이 무엇이냐?” 혹은 “뭐가 보이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셨다. 나는 밥상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10여 가지의 용도를 댄 적도 있고, 나무 한 그루를 놓고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생물ㆍ자연 지식을 쏟아놓기도 했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봇도랑에 흐르는 물을 가리키면서 던지신 “뭐가 보이니, 진유야?” 하는 질문이었다. 봇도랑 물이 폭포처럼 아래로 떨어져 흐르는 지점이었다. 내 눈에는 작은 폭포로 보였다. 내가 제일 먼저 댄 답은 “물”이었다. 아버지는 거듭 같은 질문은 던졌고 나는 뚫어지게 관찰하다가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물 아래 헤엄치는 물고기가 그 물을 뛰어넘으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러다 한 마디가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물을 뛰어넘었다. 나는 지금도 물살을 깨면서 허공으로 솟구치던 그 작은 물고기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 어머니 “그릇 장수가 제일 힘들더라.”

초등학교 4학년 무렵 가세가 기울었다. 조부모님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토지를 처분해 병원비를 대다가 순식간에 빈농으로 전락했다. 아버지 혼자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시고 어머니와 누님, 나, 동생 둘 모두 대구로 왔다.

그 시절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다. 당신은 스무 살 때까지 논밭에 한번 나가보지 않았을 만큼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자식을 위해서는 행상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떡이나 생선을 머리에 이고 팔러 다니셨다. 철이 없었던 우리는 “엄마, 떡만 파세요”하고 졸랐다. 팔다 남은 떡을 먹고 싶은 욕심에서였다. 어머니는 그 시절을 떠올리면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륵 팔 때가 젤로 힘들더라. 스덴(스텐인리스) 그륵이 얼매나 무겁노. 그거를 이고 지고 집집이 댕기면서 파는데 온 몸에 뼈가 다 아푸더라.”

중고교 시절 나는 간헐적으로 일기를 썼다. 힘들거나 기쁠 때마다 펜을 들었는데, 눈물로 얼룩져서 글자를 알아보기 힘든 페이지도 많다. 나는 힘들 때마다 펼쳐보면서 ‘까짓, 내가 이런 세월도 다 견뎠는데’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곤 했다.

돌이켜 보면 그 시절을 견디게 한 힘은 아버지의 교육 덕분이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늘 멀리 보려고 노력했다. 끝없는 고통은 없다는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봇도랑에서 본 폭포를 뛰어넘는 물고기도 간혹 마음에 떠올랐다. “내가 만약 이 고생을 못 견딘다면 그 작은 물고기보다 나을 게 뭐가 있을까” 하면서 나를 채찍질했다.

# 어려운 일도 유쾌한 농담처럼

내가 ‘공부로 승부를 걸자’고 결심한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아버지는 한문과 일어에 능하셨고, 영어를 꾸준히 공부하셨다. 종이가 귀하던 그 시절, 신문을 펼쳐놓고 펜으로 작게 글을 쓰신 후 그 위에 작은 붓으로 촘촘하게 글씨 연습을 하고, 그 다음으로 큰 붓을 들고 와 굵직한 글씨를 써내려갔다. 신문지를 3번에 걸쳐 재활용하신 것이었다. 늘 영어 사전을 펼쳐서 모르는 단어를 찾으시고 돌아가실 때까지 철학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아버지는 창원, 나는 대구에 있었지만 밤늦게 책을 펼쳐들 때마다 아버지와 함께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학인(學人)끼리의 교감이었을 것이다. 그래 그런지 무허가 집이라 전기가 끊어지는 경우가 잦아서 호롱불을 켜놓고 공부를 했지만, 책에 빠져 밤을 새우는 날이 많았다.

아버지는 내가 결혼하던 즈음(1985)에 돌아가셨다. 남매가 태어난 후 나는 아버지의 교육법을 그대로 적용했다. 자주 여행을 다니며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주고 동시에 주변의 사물과 현상을 깊게 보는 눈을 길러주려고 노력했다. 특히 일주일에 한번은 반드시 외식을 하고 있다. 그 덕에 아이들이 사춘기도 별 사고 없이 무사히 넘긴 것 같다. 그러나 아버지가 내게 해주신 것과 비교하면 1/00에도 못 미칠 것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아버지가 더더욱 그립다. 특히 홀로 지내시던 시절의 모습이 자주 생각난다. 가족을 모두 도회로 보내고 고향에서 혼자 농사를 지으면서도 한번도 우울한 얼굴을 보이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소싯적부터 농담을 잘하셨다고 했다. 가세가 기울면 우울증이 찾아올 수도 있으련만, 아버지는 늘 긍정적인 태도로 삶의 질곡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이셨다. 그것이 자식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어렵다, 어렵다, 하는 말이 사방에서 넘치는 요즘이라 그런지 아버지의 자애로우면서도 유쾌한 웃음소리가 간절히 그립다. *

◈ 아버지 허위석(許渭錫ㆍ1927~1985) - 부농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농사를 지었다. 한문, 일본어, 영어, 철학 등을 꾸준히 공부해 향반(鄕班)으로 존경받았다.

◈ 아들 허진유(許珍庾ㆍ1959~ ) - 기업은행 유통단지점 지점장. 기업은행 대구ㆍ경북 지점장 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사)식품안전 국민운동본부 경상북도 본부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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