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제천의 초겨울은 참 시원하고 산뜻하다. 호수는 수정 같아, 볼수록 두 눈이 깨끗해진다. 천연한 자연에 걸러진, 맑은 바람 들이키니 가슴 밑바닥 꼭꼭 숨겨진 콩알 같은 생채기까지 절로 아문다. ‘힐링’이 뭐 어려울까 싶다. 치열한 일상 잠깐 벗어나, 삐걱거리는 몸과 마음 정비할 수 있다면 이게 힐링이다. 초겨울 제천이 여기에 딱 맞는 고장이다.
●청풍호 조망 최고 명당… 백봉
수산면 괴곡리 뒤로 솟은 백봉 정상. 이 자리, 청풍호(충주호) 감상하는 데 더 없는 ‘명당’이다. 제천시가 여기다 전망대 만든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청풍대교에서 옥순대교에 이르는 호수의 물길이 이 자리에서 고스란히 다 보인다. 첩첩산중으로 옥빛 물길 흘러드는 풍광이 어찌나 장쾌한지 딱 10초만 바라보면 도시에서 생긴 체증이 싹 가신다. 그 유명한 옥순봉이 발아래 아득하다. 탁 트인 시야가 어느 곳과 비교 안될 만큼 압권이라는 말이다. 비봉산(청풍호 활공장) 정상이나 정방사에서 보는 풍경보다 두세 배는 더 멋지다.
걷기 열풍이 전국을 강타한 덕에 제천에도 ‘자득락길’이 생겼다. 청풍호 주변 산간 마을을 잇는 길인데, 산기슭 비탈을 따라 걸으면 호수도 보이고, 준봉들의 운치도 느낄 수 있다. 총 7코스가 조성됐는데, 백봉은 6코스(괴곡성벽길)에 속한다. 자드락길 생기기 전에도 백봉은 산 좋아하고 걷기 즐기는 이들에게 명소로 통했다. 자드락길 생긴 뒤에는 더 빠른 속도로 입소문 타고 있다.
6코스 시작은 옥순대교 인근이다. 여기서 괴곡리, 다불리를 거쳐 백봉 정상까지 가는 것이 보통이다. 녹록하지 않은 여정. 족히 2시간은 걸어야 한다. 그러나 게으름 조금 피운다면, 수산면소재지 수산중학교 뒤쪽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다불리까지 차로 갈 수 있다. 마을에 차를 세우고 ‘사진 찍기 좋은 곳’이란 안내판을 따라 완만한 산길로 약 1km 걸으면 백봉 전망대에 닿는다. 눈 많이 내리면 물론 차는 두고 걸어야 한다. 수고가 아깝지 않을 풍광이다.
산길 초입에 단출한 주막 하나 있다. 한줄기 볕 비추니 옹색한 산비탈도 몸 붙이고 살만한 곳처럼 느껴진다. 모녀가 손두부와 부침개를 만들어 파는데, 이들 모습처럼 음식 맛 소탈하고 담백하다. 이곳에서 직접 빚었다는 동동주가 세속의 묵은 갈증 풀어준다.
●호수의 속살 오롯한 ‘황석리’
제천 사람들은 충주호를 청풍호라고 부른다. 남한강 물길 막아 댐(충주댐ㆍ1985)을 만드니 제천, 단양, 충주에 걸쳐 호수가 생긴다. 이 중에서 제천 땅이 물에 가장 많이 잠겼다. 호수의 정식이름은 결국 ‘충주호’가 됐다. 그러나 터전 가장 많이 내어 준 제천 사람들은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나 보다. 여전히 이들에게 호수는 청풍호다. 이런 설명도 있다. 제천 쪽 일대를 흐르던 남한강(파수)을 이곳 사람들은 ‘청풍강’이라 했다. 강이 사라지고 호수가 생겼지만 이름은 그대로 가져왔다는 이야기다.
청풍호의 서쪽과 남쪽 일대는 관광지로 잘 개발됐다. ‘청풍호 구경간다’고 하면 십중팔구 이쪽이다. 그러나 호수의 북쪽은 한갓지다. 도로 포장 부실하고, 숙소나 음식점도 거의 없다. 소담한 마을들이 전부다. 호수 생기며 물 안 닿는 산 중턱으로 집 옮긴 사람들, 외지에서 조용한 곳 찾아 들어 온 이들이 마을마다 옹기종기 모여 산다. 몇 해 전만 해도 오프로드 자동차 동호회나 강태공들이 종종 찾긴 했지만, 먹고 살기 어려워진 탓에 이들의 발길도 요즘은 뜸하단다. 사람 북적일 일 사라지니, 하루 네 차례 다니는 시내버스가 이들에게 가장 반가운 일이 돼 버렸다. 겨울 들머리에는 더 적요하다. 그래서 북쪽 호숫가를 느릿하게 달리면, 호수의 비밀스러운 속살을 더듬는 기분이다. 눈이 놀랄 풍경보다 여운 짙은 것들이 참 많다.
금성면소재지에서 시작된 532번 지방도는 호수의 북쪽 일대를 에두른다. 길은 청풍면 황석리, 후산리, 부산리 등의 마을을 지나 충주 동량면까지 이어진다.
이 방향으로 들어오다 만나는 첫 마을이 황석리. 댐 생기기 전에는 1,000명도 더 살던 마을. 그러나 지금은 20여 가구 10여명만 남았다. 마을에서 호수가 코앞이다. 이곳 김수원씨는 “금성면소재지에서부터 황석리까지가 풍경 가장 볼만하다”고 했다
호수와 땅이 만나는 곳에 마을 사연처럼 애틋한 풍경 하나 있다. 층층이 쌓아놓은 듯한 바위 끝에 앙상한 소나무 네 그루가 서 있다. 안개 자욱하니 풍경 참 몽환적이다. 혹자는 추사 김정희가 그린 ‘세한도’와 닮았다고도 했다.
애써 마을까지 들어갔다면 이 나무들 알현해야 한다. 오래지 않아 사라질지 모를 풍경이라 그렇다. 남한강 하류에 보가 생기고, 호수가 나무를 삼키는 시간 길어지자 나무가 생기를 많이 잃었다. 김씨는 “한 겨울 아주 춥고 바람 강할 때 어른 키만한 용오름 올라오니 그 때 다시 들르라”고 했다.
●소나무 숲 아름다운 ‘의림지’
모산동에 의림지가 있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삼한시대의 그 저수지가 맞다. 아주 익숙한 탓에 여행 일정에서 빠지기 일쑤지만, 이 고즈넉한 저수지의 초겨울 풍경이 제법 정갈하다. 일찌감치 터 잡은 겨울새들이 잔잔한 수면을 소리 없이 가른다. 사람들은 저수지를 끼고 걸으며 청명한 공기 들이킨다. 몸체가 몇 아름이나 되는 소나무가 제방에 늘어섰다. 나무들의 몸체가 우람하고 휘어진 모양새가 아름다워 숲은 국가명승(20호)으로 지정됐다. 수리시설의 소나무 숲이 나라의 볼거리로 선정된 일은 이례적이다. 봄, 여름에는 수면위로 무성한 가지 늘어뜨린 버드나무들이 볼만한다. 사람들은 숲에서 자전거를 타고 휴식을 취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끝낸다.
제천은 한약재 집산지로 명성 자자하다. 전국 생산량의 약 20%가 제천에서 나고 유통량의 80%가 제천에서 거래된다. 의림지에서도 조선시대 때 붕어가 많이 잡혔단다. 약으로 손색없어 제천 사람들은 이를 ‘약붕어’라고 하고, 왕에게 진상도 했단다. 비록 약붕어는 자취를 감췄지만, 천연한 풍경은 여전히 이곳 사람들에게 삶의 생채기 치유하는 ‘약’이 되고 있다.
●‘박하사탕’의 달콤한 추억… 진소마을
2000년 개봉한 영화 ‘박하사탕’은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한마디 절규로 기억된다. 제목인 박하사탕이 영화 어디쯤 등장하는지 희미하지만, 철교 위에서 절규하던 영호(설경구 분)의 모습은 1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이 장면이 촬영된 곳이 백운면 애련리 진소마을이다. 영화가 뜨자 당시만 해도 오지로 꼽히던 이 마을이 사람들에게 입소문 타기 시작했다.
충북선이 전철화 된 탓에, 당시에는 없던 전깃줄과 전봇대가 생겼다. 그러나 영화의 서정은 오롯하다. 마을 에두르는 강변에 아직 잎을 떨구지 못한 갈대가 볕을 받아 반짝인다. 주변이 고요한 덕에 물소리 참 맑고 또렷하다. 기적을 울리며 기차가 터널을 빠져나온다. 첫사랑의 애틋함, 박하사탕의 달콤한 추억도 어두운 기억의 터널을 통과해 다시 스멀거린다. 강변 마을의 초겨울 풍경이 참 곱다.
●여행메모
▲먹거리: 청풍호 주변 청풍면 북진리에 있는 황금가든(043-647-6300)은 카레 원료가 되는 울금(강황)을 넣은 떡갈비로 이름난 음식점이다. 고기를 아주 부드럽게 다졌고 여느 떡갈비보다 많이 달지 않다. 떡갈비정식 2만원, 떡갈비ㆍ돌솥밥정식 2만3,000원이다.
봉양읍 장평리에 있는 산아래(043-646-3233)는 유기농으로 직접 재배한 채소를 이용한 쌈밥이 유명하다. 밑반찬도 아주 정갈하다. 쌈밥 중에서는 우렁쌈밥이 인기다. 우렁쌈밥은 1만5,000원이다.
‘빨간오뎅’은 제천에서 유명한 주전부리다. 넓적한 어묵꼬치를 떡볶이 양념처럼 매콤한 양념에 묻혀내는데 살짝 달달하면서도 매콤한 맛이 일품. 제천에서는 오래전부터 떡볶이 대신 이른바 빨간오뎅이 많았단다. 제천 중앙시장 입구 맞은편 가게가 유명하다. 4개 1,000원이다.
▲숙소: 백운면 평동리에 위치한 리솜포레스트는 울창한 숲과 럭셔리 스파를 갖추고 있다. 객실은 모두 독립 빌라형으로 지어졌고, 에코힐링프로그램, 해브나인 힐링스파, 리조트 둘레길 등 ‘힐링’과 어울리는 시설들이 알차게 갖춰졌다. 참 조용하다. 리솜포레스트 (043)649-6000
▲가는 길: 중부내륙고속도로 감곡IC로 나와 국도 38호선을 이용하거나 중앙고속도로 제천IC를 이용하면 제천까지 간다. 청풍호와 인접한 청풍면으로 바로 가려면 중앙고속도로 남제천IC가 빠르다. 제천시청 관광과(043)641-6690
제천=글ㆍ사진 김성환기자
한국스포츠 김성환기자 spam001@hksp.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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