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정세가 소용돌이치고 있다. 미국 중국 일본 등 강대국들이 주도권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북한 권력 내부도 요동치고 있다. 일각에선 '구한말과 같은 위기'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송민순(65) 전 외교통상부 장관과 경희대 국제대학장 겸 국제대학원장인 박한규(51) 교수에게 동북아 상황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들어봤다.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와 외교안보 정책 방향'을 주제로 열린 대담은 10일 낮 서울 장충동 앰배서더 호텔에서 1시간 30분 동안 진행됐다. 두 사람은 "구한말과 같은 위기는 아니지만 매우 위중한 상황이다. 우리가 창조적 외교를 하면서 협력 촉진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송 전 장관은 동중국해 방공식별구역을 둘러싼 갈등과 관련, "한ㆍ중ㆍ일과 미국 등 4개국 대표가 제주도에서 모여 협의하자고 제안하는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강대국들이 우리 앞마당에서 주도권 대결을 벌이는 상황에서 우리가 정파적 싸움에 매몰돼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한일관계 정상화를 위해서는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의 자세 전환이 필요하다는 게 두 사람의 의견이었다.
대담 진행= 김광덕
_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 추진, 중국의 일방적인 방공식별구역 확대 선포, 장성택 북한 국방위 부위원장의 실각 등으로 우리의 외교안보 환경이 3각 파도를 맞고 있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이 일방적으로 세계질서를 이끌어 왔는데 최근 다자주의로 바뀌고 있다. 동아시아에선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집단적 불안 증대가 주요 변수가 되고 있다. 세계사를 돌아보면 민족주의, 영토회복주의, 군사주의 등 세 가지가 겹치면 엄청난 재앙이 생겼는데, 요즘 동아시아에서도 그런 조짐이 있다. 한반도에서 남과 북이 화해와 협력으로 가면 견뎌낼 수 있는데, 남북이 대결로 치닫고 있는 게 문제다. 자칫 잘못하면 구한말과 같은 열강의 세력 다툼에 휘말릴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지만 실제로 구한말과 같은 위기는 아니라고 본다. 우선 우리의 국력이 크게 달라졌다. 또 무력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국제질서도 아니다. 미국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묵인한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과 같은 악몽을 거론하기도 하는데, 한국이 밀약 대상이 될 정도로 약하지는 않다. 구한말의 악몽을 되새길 필요까지는 없지만 다른 나라에 이용당하지 않는 국가 위상을 확립하고, 남북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국내 정치를 잘 하고 대외정책을 좀 더 짜임새 있게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박한규 경희대 국제대학장= 요즘 동북아 정세는 국제정치의 권력정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많은 학자들은 이를'아시아 패러독스'란 용어로 설명한다. 세계경제 1,2,3위 국가인 미국 중국 일본 사이에 경제적 상호의존성과 협력은 확대되는 반면에 군사적 대결 수위는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가 구한말과 같은 위기에 처했다는 데는 동의하지 않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구한말 당시와 닮았다고 할 수 있다. 강대국 간 힘의 재편이 우리 앞마당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남북이 대결하고 있고, 국내에서는 정치세력들이 대립하고 있다. 우리가 위중한 상황에 처한 것은 사실이다. 여야 정치 지도자들이 힘을 모으고 최선의 외교안보 전략을 마련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_'동북아 평화협력 구상'과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정책을 제시한 박근혜 정부의 임기 첫해 외교안보 정책을 점검해 달라.
송= 박근혜 정부 외교안보 정책의 핵심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와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인데 내용이 제대로 채워지지 않았다. 남북 간 신뢰는 말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 이뤄진다. 대결 상태에서는 약자가 먼저 행동하기 어렵다. 우리는 '북한이 먼저 행동하면 따라주겠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렇게 하면 신뢰 프로세스가 제대로 가동되지 않는다.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도 6자회담의 9ㆍ19 공동성명(2005년) 합의에 기초해서 진행해야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남북관계와 북핵 문제 해법을 진전시켜야 하는데 박근혜 정부는 이런 문제에는 소극적으로 임하고 겉모양에 신경을 쓰는 것으로 비치고 있다. 취임 첫해이므로 관망ㆍ탐색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기간이 너무 긴 게 걱정이다. 워밍업 기간이 길면 주변 상황이 기다려주지 않는다.
박= 북한의 3차 핵실험과 권력 내부 요동 등이 있었으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정책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협력하면 확실하게 보상하지만 위협 행위를 하면 보상이 없다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전달했다. 아쉬운 점은 남북 대화가 너무 부족했다는 것이다. 대화 자체가 양보는 아니므로 박근혜 정부는 남북 대화를 가능하면 많이 해야 한다.
_미국ㆍ일본과 중국의 주도권 경쟁에 따른 동북아의 긴장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은 어떤 것들이 있나. 미국 및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 게 바람직한가.
박= 한미동맹 강화를 기본축으로 해서 안보전략을 펴야 한다. 그렇다고 중국과 소원하게 지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중국과는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업그레이드 시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미국이 주도하는 환태평양 경제동반자협정 (TPP)과 중국이 주도하는 역내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RCEP) 문제에서도 우리는 중견 국가로서 창의적 외교를 발휘해야 한다. 한국은 최근 TPP에 가입하겠다고 선언했는데, RCEP에 소속된 많은 국가와도 자유무역협정(FTA)을 맺고 있다. 아태지역의 두 경제 블록이 충돌적 관계가 아니라 보완적 관계가 돼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중견국가로서의 중개자 역할을 해야 한다. 안보 문제에서 한미 협력관계 유지를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미국의 대외 정책을 무조건 따라가지 말고 속도 조정을 할 필요가 있다.
송= 한반도는 해양과 대륙의 경계선에 있다. 해양과 대륙이 충돌하기보다는 접합하고 조화될 수 있도록 해야 우리 입지를 강화할 수 있다. 중국을 뺀 TPP, 중국과 러시아를 겨냥한 MD 체제 등은 해양과 대륙을 분리시키는 대표적 장치들이다. 반면 중국은 미국을 빼고 RCEP를 추진하고 있다. 우리는 두 가지 입장을 조화시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 TPP에만 가입하면 한쪽에 서게 된다. 미사일 문제에서도 방어체제 구축보다는 그 원인인 북한 미사일 해소를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 미국과 일본은 한미일 동맹 체제가 강화되기를 원하고 있는데 우리가 구체적 모양으로 합류하면 중국 봉쇄 전략의 최전선에 서게 된다. 이런 상황은 한국과 한반도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 미국과 중국은 동북아에서 북한, 일본ㆍ중국의 영토 갈등, 대만, 경제 질서 문제 등을 놓고 갈등하고 경쟁한다. 한반도 문제에서는 우리가 힘이 없는 게 아니다. 중국도 미국도 한국의 지지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국민의 통합된 목소리를 배경으로 정책을 추진하면 힘을 실을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국내의 단합된 힘과 정치 지도자의 정치력이 필요하다. 대통령 5년 단임제에서는 거대한 플랜을 장기적으로 추진할 의지를 갖기 어렵다. 5년 후에 큰 초석을 놓은 대통령으로 평가 받겠다는 지도자의 정치력과 용기가 필요하다.
_중국의 방공식별구역(ADIZ) 선포에 대응해 우리 정부도 홍도, 마라도, 이어도를 포함하는 방공식별구역 확대를 선언했는데, 이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은.
송= 중국이 최근 서해, 남지나해에 없는 방공식별구역을 동중국해에 설정한 것은 센카쿠(중국명ㆍ댜오위다오) 열도 문제에서 공세적으로 나오는 일본에 대한 대응으로 볼 수 있다. 우리 정부도 8일 방공식별구역 확대를 선언했으니 이를 확실하게 이행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또 한국 중국 일본과 미국 등 4개국이 방공식별구역에 대해 공동으로 협의하자고 제의하는 창의적 외교 노력을 주도할 필요가 있다. 3개국에 전화해서 제주도 같은 데서 협의하자고 제의하면 어느 나라도 못하겠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박= 서로 겹치는 방공식별구역에서의 우발적 충돌을 막기 위해 우리가 아이디어를 내놓고 중재자 역할을 하는 창조 외교가 필요하다. 가령 군용기 통과에 대해서는 상호 통보하되, 민간항공기에 대해서는 통보를 면제하는 등의 방법이 있을 수 있다.
_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추진, 독도ㆍ위안부ㆍ강제 징용 문제 등을 둘러싸고 한일관계가 악화돼 왔는데, 한일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방안이 있다면.
박=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이란 장기적 경기 침체, 대지진, 원전 사고 등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강력한 리더십의 등장을 원하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출발한 아베 내각은 집단적 자위권 추진 등 우경화의 길을 걸으면서 한일관계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과거사 문제 등으로 한일 정상회담이 장기간 개최되지 않고 있는데, 계속 이렇게 갈 수는 없다. 따라서 정상회담 등 각종 대화를 통해 일본측 인사들의 과거사 미화 발언을 자제하도록 강력히 요청하고 미래지향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적극 논의할 필요가 있다.
송=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식민지배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죄, 사죄 수용과 미래지향적 관계를 위한 노력 등을 담고 있다. 당시 양국은 이 선언을 벽에 걸고 한일관계를 이끌어가자고 다짐했는데, 아베 총리는 아무런 설명 없이 이 선언을 벽에서 내려 버린 셈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아베 총리를 만나는 것은 적절치 않다. 한일관계에서는 박 대통령이 잘하고 있다. 일본이 과거사 문제에서 분명한 인식을 가져야 한일관계가 제대로 된다는 점을 미국에도 전할 필요가 있다.
선임기자 kd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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