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낀 풍경이 스크린을 연다. 고층 주상복합 건물이 흐릿하게 보인다. 누구의 시선일까. 궁금증은 곧 풀린다. 동티모르 출신 이주노동자의 눈으로 본 전경이다. 고층 주상복합은 이주노동자들의 코리안 드림을 상징하거나 그들이 막연히 생각하는 한국의 이미지를 압축한다 할 수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그 거대한 주상복합 건물을 지탱하면서도 정작 그곳에 거주할 수 없는 존재다.
영화 '풍경'의 강렬한 도입부는 96분 동안 이 영화가 무엇을 이야기할지 암시한다. 하루하루를 부대끼는 삶의 터전에서 국외자로 살 수 밖에 없는 이주노동자들의 모습을 스크린에 투사한다. 꿈을 이루기 위해 한국에 들어와서 이내 이질적인 풍경이 되어버린 이주노동자들의 일상은 곧 한국 사회의 이면이다.
영화의 서술 방법은 간단하다. 동티모르와 필리핀, 방글라데시 등 아시아 9개국 출신 이주노동자 14명의 일과 삶을 들여다보고 그들이 한국에서 꾼 가장 인상적인 꿈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동티모르에서 온 아우구스티노는 한국에 있는 동안 고국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매일 꿈에서 만났다는 사연을, 방글라데시 출신 와리우라는 현실에선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제주도를 아내와 함께 여행하는 아름다운 꿈을, 스리랑카인 타실라는 "사장님 사모님 공장장님" 등과 스리랑카의 명승지를 여행하는 꿈을 각각 소개한다. 별스럽지 않은 듯한 이들의 꿈은 이주노동자들의 억제된 욕망과 한국 사회에서의 고단한 삶을 반영한다. 3년 동안 일하던 공장을 그만두려 마음 먹은 뒤 사장님을 찾아가 '내일부터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꿈을 다섯 번이나 꿨다는 방글라데시인 세크할, 자신의 생업인 돼지 내장 손질하는 꿈이나 추방당하는 꿈을 꾼다는 중국인 쉬첸민 등의 사연은 조용히 가슴을 누른다.
이주노동자 각자가 일하는 풍경과 꿈 이야기는 하나하나 모여 커다란 모자이크를 형성한다. 먼지 날리는 협소한 가구공장, 기계음이 고막을 자극하는 염색공장, 상추가 가득한 비닐하우스 밭 등에서 묵묵히 노동에 전념하는 그들의 모습은 소리 없이 몇몇 질문들을 던진다. 3D업종에 해당하는 일들을 하며 한국 사회의 바닥을 다지고 있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인가, 한국인은 그들을 사회구성원으로 진정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렇다고 영화는 성급히 어떤 구호를 외치려 하지 않는다. 어느새 우리 사회의 일부가 되었으면서도 우리가 주시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비추며 지금 한국 사회의 '진짜 풍경'을 전한다.
'망종'과 '당시' 등으로 해외영화제에서 호평 받은 재중동포 장률 감독의 첫 다큐멘터리다. 극에서 다큐멘터리로 화법은 바뀌었으나 물끄러미 사물을 바라보는 카메라는 여전하다. 장 감독은 얇은 종이 한 장 한 장으로 두툼한 책을 만들어내듯 무심한 듯한 눈빛으로 감정 하나하나를 차곡차곡 쌓아간다. 독립영화의 대가답다. 12일 개봉, 전체 관람 가.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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