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일본식 러브호텔과 결합밀애ㆍ불륜… 성범죄 집결지 취급호텔식 인테리어와 수준급 시설 완비 대안적 문화공간 역할과 기능 자처젊은 층에게 긍정적 반응 끌어냈지만'성적쾌락과 욕망의 장소' 이미지 여전
인테리어업에 종사하는 강모(32ㆍ여)씨는 지방 출장 때마다 숙소를 고를 때 심혈을 기울인다. 그는 호텔보다는 모텔을 선호한다. 최신 편의시설을 갖춘 것은 물론 인테리어도 수준급인 곳이 많기 때문이다. 반신욕을 즐길 수 있는 욕조와 월풀, 개인 사우나를 갖춘 곳도 있다.
강씨는 최근 대구의 한 모텔을 찾았다가 말 그대로 '문화충격'을 받았다. 침대 옆 버튼을 눌렀더니 진동 소리와 함께 천장이 서서히 열리는 게 아닌가. 강씨는 "예식장에서나 볼 수 있었던 광경을 하룻밤 7만원짜리 모텔에서 보는 게 놀라웠다. 요즘 모텔은 호텔보다 청결하고 욕조도 훨씬 커 목욕도 즐길 수 있다"며 "와이파이도 실컷 쓰고 IPTV로 영화도 마음대로 골라본다. 테마모텔이 많아져서 어디에 묵을지 검색하는 재미도 있다"고 말했다.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모텔이 달라지고 있다. 음지에서 성행하던 모텔산업이 최근 들어 다양한 시설과 차별화된 서비스를 앞세워 현대인의 생활 속으로 깊이 침투하고 있다.
성매매 이미지의 모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숙박시설은 객주나 주막이었다. 1880년대 개화기를 맞아 근대식 숙박 업소인 '여관'이 등장했다. 여관은 1910년 이후 일제의 식민지 정책으로 발달한 도시를 중심으로 발달했다.
1960년대 이후 경제발전이 이뤄지면서 여관산업도 번창했다. 박정희정부는 1961년 2월 '숙박업법'을 제정해 호텔 여관 여인숙 등의 영업을 허가했다. 40년간 여관업에 종사한 김창배(82)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1972년에 동대구역 뒤에서 여관 장사를 시작했다. 그때는 경상도의 청년들이 모두 대구로 몰려들어 여관에 빈 방이 없었다. 물론 여관도 얼마 없었고. 공용 욕실을 사용할 때라서 목욕탕 장사도 쏠쏠했다. 10년 사이에 여관을 두 채나 더 지을 만큼 장사가 잘됐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모텔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본래 모텔의 사전적 정의는 '자동차 여행자가 숙박하기에 편하도록 만들어 놓은 여관'이다. 미국에서 건너온 말로, 자동차를 뜻하는 모터(moter)와 호텔(hotel)의 합성어다.
하지만 한국의 모텔은 미국보다는 일본의 '러브호텔'에 가깝다. 러브호텔은 대게 성관계가 주목적인 숙박업소를 뜻한다. 모텔은 객실과 공중목욕탕으로 구성된 여관산업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러브호텔의 탈을 쓴 모텔이 들어오면서 한국의 성문화는 크게 달라졌다. 청춘남녀나 불륜 커플이 애정행각을 펼칠 수 있는 은밀한 장소가 됐다. 여관의 공중목욕탕이 사라지고 모텔에는 개인 욕실이 자리 잡았다. 성적 판타지를 제공해야 된다는 강박관념 탓인지 객실은 갈수록 농염해졌다. 모텔 주인들은 화장실에 전신 거울을 설치했고, 투명한 유리로 성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객실엔 붉은 조명을 달고 성인 방송을 자유자재로 볼 수 있는 TV를 구비해 놓았다. 이러한 ' B급 정서'는 각종 성범죄가 벌어지는 단초를 제공했고, 모텔은 오랜 시간 '성매매의 온상' '성범죄 집결지'라는 오명을 썼다.
양지로 나온 모텔 '의식'은 음지 맴돌아
2004년 성매매특별법 시행은 모텔 산업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모텔에서 성매매 알선 행위가 적발된 경우 영업정지나 영업장 폐쇄 등 강력한 행정 처벌이 내려졌다. 수많은 모텔이 처벌 대상이 됐다. 경기 침체와 맞물려 모텔 산업과 유흥 산업 전반이 침체되자 손님이 줄어들었다. 2005년에는 경매로 나오는 모텔이 너무 많아 이슈가 될 정도였다.
이를 계기로 모텔은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기 시작했다. 객실의 붉은 조명을 없애고 호텔 부럽지 않은 은은한 조명으로 갈아 끼웠다. 성인 방송 일색이던 브라운관 TV 대신 최신 영화와 게임을 즐길 수 있는 LED TV를 들여 놓았다. 욕실은 여전히 은밀함을 강조하되 월풀 등 최신 시설로 고급스럽게 꾸몄다. 연인들의 장소는 친구, 가족과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바뀌었다.
모텔이 바뀌자 가장 먼저 마음을 연 건 젊은 세대. 공중파 방송에서 모텔 이용 경험을 말하는 것도 스스럼없는 일이 됐다. 가수 윤도현은 스스로를 '모텔 마니아'로 칭하고, 영화평론가 허지웅은 '무인 모텔을 운영해보고 싶다'고 농담하기도 한다.
대학생들 사이에서 모텔 이용은 더 이상 흉이 아니다. 대학생 최모(23)씨는 여자친구와 데이트할 때 마다 모텔을 즐겨 찾는다. 최씨는 "지난 번 여자친구 생일 땐 신촌 모텔에서 근사한 촛불 이벤트를 해줬다. 대실료 3만원, 초 값 1만원, 풍선 값 1만원, 피자 값 2만원을 썼다. 영화 보고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서 밥을 먹는 것보다 비용은 적게 들고 만족도는 훨씬 높다. 모텔 안에서 영화도 볼 수 있고 노래도 부를 수 있어서 여자친구와 특별한 날에 이용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이안나 부산대 여성연구소 전임연구원은 지난해 발표한 '모텔 이야기: 신자유주의시대 대학생들의 모텔 활용과 성적 실천의 의미 변화' 논문에서 대학생들의 모텔 이용 세태를 분석했다. 이 연구원은 대학생 12명의 사례 분석을 통해 '모텔은 불륜이나 일탈의 장소가 아니라 우리 사회 성문화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현실을 반영해주는 일종의 대안 공간'이라고 정의했다.
이 연구원은 "모텔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우리 사회의 전통적 시선과 그동안 언론 매체에서 다뤄온 모텔의 이미지가 강하게 반영됐다. 모텔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대학생들은 모텔의 시설과 다양한 기능을 강조하면서 쾌적하고 편안한 휴식의 공간으로,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데이트 코스로 받아들였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 연구원은 "모텔에서 쓴 샴푸 냄새를 들키지 않기 위해 개인 용품을 들고 다니는 대학생들의 모습에서 성적 주체로서의 당당함이나 자유로움을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여전히 여학생들이 남학생에 비해 모텔을 이용할 때 더 많이 시선을 의식하는 이중적 성규범이 지금의 대학생에게도 적용되고 있다. 모텔이 최근 들어 새로운 기능과 역할을 자처하고 있지만 성적 쾌락과 욕망의 장소라는 이미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지현기자 hyun1620@hankoo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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