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저녁 서울 소공동 한 극장 안은 관객으로 가득했다. 예매 시작 2시간 만에 150여장의 티켓을 매진시킨 이들이었다. 홍콩 감독 왕자웨이(王家衛)를 만난다는 사실만으로도 관객들의 얼굴은 상기됐다. 왕자웨이 감독은 '동사서독 리덕스'(2008)의 개봉(5일)을 맞아 3일 한국을 찾았다.
극장가에 몰아치고 있는 추억의 영화 바람 속에서 왕자웨이 감독의 위상은 독보적이다. 시간 속에 묻혔던 그의 영화들이 올해 잇달아 극장가를 찾았다. 왕자웨이의 이름을 한국 대중에 각인시킨 '중경삼림'(1994)과 가장 서글픈 사랑 영화 중 하나로 종종 꼽히는 '화양연화'(2000)도 상영 중이다. '동사서독'(1994)을 새롭게 편집한 '동사서독 리덕스'는 영화계에서 국내 상영은 불가능할 것이란 예측이 몇 년 동안 나돌던 작품이다.
소리 없이 강한 왕자웨이 바람은 지난 8월 극장가에서 확인됐다. 멀티플렉스 체인 CGV가 2주일 동안 개최한 그의 특별전은 영화팬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왕자웨이의 장편 데뷔작 '열혈남아'와 '아비정전' '타락천사' 등 8편을 상영했는데 전회 매진을 기록했다. CGV가 부랴부랴 추가 상영을 결정할 정도로 대단한 열기였다.
추억의 영화 중 왕자웨이 작품이 왜 눈에 띄는 강세를 보일까. 영화 관계자들은 왕자웨이 영화와 함께 20대를 보낸 관객들을 요인으로 꼽는다. 왕자웨이 영화를 찾는 관객들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이 많다. 1990년대 초ㆍ중반 대학에 발을 디딘, 이른바 '응사(응답하라 1994) 세대'다. '응사 세대'는 극장가 추억의 영화 붐을 이끌고 있다.
89년 '열혈남아'로 국내 첫 선을 보인 왕자웨이 영화는 당초 소수 영화광들의 전유물이었다. 90년 개봉한 '아비정전'은 관객들의 환불 요구를 받기도 했다. 영상세대를 자처하며 이전 세대와 다른 문화적 감성을 지닌 '응사 세대'는 왕자웨이 영화를 주목했다. 이들은 화려한 색감과 활발한 카메라 움직임, 감수성 넘치는 음악으로 청춘의 방황을 묘사하는 왕자웨이 영화에 열광했다.
특히 '중경삼림'은 이들을 매혹시켰다. 95년 개봉해 서울에서만 두 달 넘게 상영하며 20대 관객의 정서를 대변하는 영화로 떠올랐다. 스크린에 깔린 팝송까지 덩달아 인기를 얻었다. 60년대 발표된 포크그룹 마마스 앤 파파스의 곡 '캘리포니아 드리밍'이 담긴 음반은 30만장 넘게 팔렸다. 마마스 앤 파파스는 '중경삼림'의 후광 덕에 96년 첫 내한공연을 갖기도 했다. '응사 세대'인 오은영 CJ E&M 영화사업 부문 부장은 "왕자웨이는 국내 영상 혁명을 촉발했다 할 수 있다. 당대 영화학도들 대부분은 그의 영향 아래 있었다"고 말했다.
'화양연화'도 '응사 세대'가 뜨거운 호응을 보낸 영화였다. '응사 세대'가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 문제로 고민할 즈음에 개봉됐다. 배우자의 부정한 관계를 눈치챈 두 남녀가 머뭇거리며 다가서다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모습은 '응사 세대'의 마음을 울렸다. 지난 8월 특별전 관객들이 가장 열광했던 영화도 '중경삼림'과 '화양연화'다.
'응사 세대'의 왕자웨이 사랑은 극장가 마케팅에도 활용되고 있다. 멀티플렉스 체인 롯데시네마는 '동사서독 리덕스'와 '화양연화' '중경삼림'을 묶어 삼색 로맨스라는 이름의 기획전을 열고 있다. 이 행사를 기획한 정진하 롯데시네마 프로그램팀 대리는 "생계에 바빠 영화를 멀리해온 이들을 극장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행사를 준비했다. 30대 후반~40대 초반 관객들에겐 왕자웨이 영화가 제격이라 판단했다"고 밝혔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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