넬슨 만델라의 죄수번호는 46664였다. 1964년 케이프타운 앞 로벤섬에 수감된 466번째 죄수란 뜻이다. 그는 아파르트헤이트 철폐를 요구하며 민주화 운동을 하다 수감된 27년의 옥살이 기간 동안 이름 대신 이 번호로 불렸다.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대통령에 당선된 그는 자신을 죽음의 문턱으로 몰았던 정적들에게 칼을 휘두르는 대신 넓은 가슴으로 그들을 끌어 안았다. 보복 대신 용서와 화합으로 남아공을 바꾸었다.
만델라는 1918년 7월 18일 남아공 동남부 트란스케이주의 시골 마을 음베조에서 코사어를 쓰는 템부족의 추장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당시 이름은 롤리흘라흘라 만델라였다. 남아공은 17세기 중반 이후 백인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그는 그 영향으로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넬슨이라는 서양식 이름을 갖게 된다.
흑인으로는 이례적으로 초중고교를 졸업하고 1940년 흑인대학 포트헤어대에 입학했지만 정학처분을 받는다. 6명으로 구성된 학생회의 대표로 선출된 그는 학생회가 대학 당국의 정책을 그대로 통과시키는 거수기 노릇을 하고 있다며 대표에서 사임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만델라는 템부족 왕이 정해둔 여인과 결혼시키려 하자 요하네스버그로 피해갔다.
그곳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환으로 일하던 만델라는 흑인 지식인층과 교분을 쌓으면서 흑인차별정책의 부당함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1943년에는 당시 민주화 투쟁을 주도하던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가담했고 이듬해에는 청년조직인 ANC청년동맹 창립 멤버로 참여했다.
1952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남아공 최초의 흑인 변호사가 된 그는 본격적으로 인권운동을 시작했지만 흑인 변호사를 인정하지 않는 현실의 벽을 실감했다. 흑인 70여명이 비폭력 저항 시위에 참여했다가 숨진 샤퍼빌대학살이 1960년 일어나자 만델라는 본격적인 무장 투쟁에 나섰고 결국 4년 뒤 국가반역죄로 종신형에 처해진다.
로벤섬에 갇힌 만델라는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등 괴로운 시간을 이어갔다.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에서 그는 '민족의 행복을 내 가족의 행복보다 앞세우는 게 올바른 선택인가'라며 괴로운 심경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는 점차 인권 운동의 상징적 존재가 되고 있었다. 옥중의 만델라는 1979년 자와할랄네루상, 1981년 브루노 크라이스키인권상, 1983년 유네스코의 시몬볼리바르 국제상을 수상했다. 국제사회의 압력이 커지자 남아공 정부는 1990년 2월 그를 석방했다.
이듬해 7월 ANC 총재에 취임한 만델라는 데 클레르크 대통령이 이끄는 남아공 백인정부와 협상해 350여년에 걸친 인종 갈등을 중단시킨다. 이 공로로 그는 1993년 데 클레르크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5월에는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당시 나이 76세였다.
만델라는 흑인을 탄압하던 백인을 용서와 화합의 정신으로 포용해 무지개처럼 서로 다른 인종이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나라를 꿈꾸었다. 그는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화해와 국가 건설을 위해 함께 행동해야 한다"며 "모든 사람이 일자리, 빵, 물, 소금을 갖고 이 아름다운 나라에 다시는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고 강조했다.
그는 재임 기간 동안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데스먼드 투투 주교를 위원장으로 하는 진실화해위원회(TRC)를 출범시켜 피를 흘리지 않고 과거사를 정리했다. 백인 정권 시절 경찰, 군 등 보안기관에 근무하며 흑인을 테러하고 그들을 탄압한 가해자가 TRC에 출두해 진실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사면했다.
데 클레르크를 부통령에 임명하고, 아파르트헤이트 정보 책임자였던 니엘 바너드와 자신에게 종신형을 구형한 퍼시 유타 검사 등을 초청해 극진히 대접한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그가 남긴 화해와 평화의 정신은 흑인과 백인이 조화와 공존을 이루며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신념을 남아공에 정착시켰다.
■ 어록
▲"만약 다시 한 번 살 수 있다면 다시 같은 방식으로 살겠다. 사나이로 불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누구든 그렇게 할 것이다."(1962년 11월 프리토리아 유대교성당 연설에서)
▲"나는 일생을 백인이 지배하는 사회에도, 흑인이 지배하는 사회에도 맞서 싸웠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기회를 갖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필요하다면 그런 소망을 위해 죽을 준비가 돼 있다."(1964년 4월 내란 혐의 재판의 최후진술에서)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와 민주주의, 자유의 이름으로 인사한다. 당신들의 지칠 줄 모르고 영웅적인 희생 덕분에 내가 오늘 여기 서 있다. 그러므로 나는 남은 인생을 여러분의 손에 맡긴다."(1990년 2월 27년간의 복역을 끝내며)
▲"마침내 정치적 해방을 성취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가난과 상실, 고통의 노예로부터 해방시킬 것을 스스로 다짐한다. 다시는 이 아름다운 땅에서 사람이 사람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 자유가 흘러 넘치도록 하자. 신이여, 아프리카에 은총을 베푸소서."(1994년 5월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한 사람이 태어나서 자신이 속한 국민과 국가를 위해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을 다 마쳤다면 그는 평안하게 안식을 취할 수 있다. 나는 그런 노력을 했다고 믿고 있고 그래서 영원히 잠잘 수 있을 것이다."(1996년 만델라 어록집에서)
▲"27년의 옥살이가 내게 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독의 침묵을 통해 말이 얼마나 귀중한 것이고 얼마나 사람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지 알게 됐다는 것이다."(2000년 7월 더반 국제 에이즈 콘퍼런스 폐막 연설에서)
▲"우리 시대의 역사가 쓰여진다면 세계 위기의 순간에 등을 돌린 세대로 기억되거나 옳은 일을 했다고 기록될 것이다."(2005년 6월 노르웨이 연설에서)
▲"자신이 하는 일에 헌신하고 열정적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처한 환경을 뛰어넘을 수 있으며 성공할 수 있다."(2009년 12월 크리킷 선수 마카야 은티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름다운 남아프리카에 대한 꿈이 있다면 그 꿈에 이르는 두 가지 길도 있다. 그것은 바로 호의와 용서라는 길이다."(2011년 6월 넬슨 만델라 메모리센터가 펴낸 '자기가 본 넬슨 만델라' 명언집에서)
김종한기자 tellm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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