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딱한 일이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급기야 테이블까지 내리치며 고성을 내질렀다. 국회 정상화를 위한 여야 4자회담에서였다고 한다. 전해진 데 따르면 김 대표가 민주당 국회 복귀의 조건으로 특검 수용을 요구하자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가 예산안 우선 처리를 종용하며 "국민을 볼모로 잡자는 거냐"고 받아 쳤다. 빤한 국민 타령에, "국민은 무슨…"이라며 씨근덕거리던 김 대표가 이내 '쾅'하고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리곤 "나 김한길이 관둬도 좋다 이거야. 누가 죽나 한번 봅시다"라며 결기를 터뜨렸다.
여야 대표의 정치협상을 두고 감히 딱하다는 말을 갖다 붙인 건 살풍경한 말과 행동 탓만은 아니다. 사실 격렬한 정치판에서야 짐짓 치고 받는 게 다반사 아니겠는가. 정작 씁쓸한 건 두 사람이 얼굴을 붉힌 쟁점이라는 게 여전히 낙후된 우리 정치의 수준을 새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줄기차게 주장해온 국가기관 대선개입 특검 문제만 해도 그렇다. 국정원이나 군 사이버사령부가 댓글 활동을 통해 조직적으로 지난 대선에 개입했다면 분명 헌정을 문란케 한 중대사안이다. 하지만 그게 선거결과에 영향을 줄 정도로 투표함을 바꿔치기 하거나, 대리투표 같은 짓을 대대적으로 벌인 것이 아닌 이상, 선거결과에 불복하거나 대통령 사퇴를 거론할 만한 일이 안 된다는 것 또한 엄연한 상식이다.
검찰수사 역시 과거처럼 문제를 덮기에 급급한 수준도 아니었다. 오히려 수사검사들은 그 동안 외부 압력과 싸우며 이번 사건의 파이를 점점 키워온 게 사실이다. 따라서 상식적인 다수는 민주당이 새삼 특검을 걸고 국회일정까지 전면 거부하기보다는 일단 검찰수사를 지켜본 뒤 미흡하다면 재론하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은 결과적으로 공당으로서 보편적 공감의 경계를 지켜내지 못했다. 야권 연석회의가 들썩이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재림해 대통령 사퇴론까지 내자 엉거주춤 했다. 그 틈을 타고 내년 지방선거까지 이 문제를 정치쟁점화 하자는 당내 정치공학적 강경론까지 득세해 결국 이 문제를 들이밀고 구태의연한 싸움판을 벌인 셈이다.
물론 정치의 질을 떨어뜨린 책임은 청와대와 여당이 더 크다. 책임 있는 국정 주도세력이라면 민주당을 당연한 국정 파트너로 포용하고 존중함으로써 사분오열된 국론을 공당의 틀 내로 수렴하는 데 힘썼어야 했다. 하지만 민주당 지도부가 가뜩이나 내외의 흔들기에 몰려 있는 상황에서 손을 잡아주기는커녕 감사원장 임명동의안을 단독 처리함으로써 오히려 국회 밖으로 내몰았다.
그러잖아도 대통령비서실장부터 줄줄이 이어진 인선에서 '불통정치'라는 비판을 받아온 청와대였다. 그게 누그러지기는커녕 여야 4자회담 멍석을 깔자마자 대뜸 황현찬 감사원장, 문형표 보건복지부장관, 김진태 검찰총장의 임명을 강행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따지고 보면 청와대와 여당의 이런 행태가 민주당으로 하여금 죽기살기식 싸움을 벌이지 않을 수 없는 데까지 몰아간 셈이다.
국민이 바라는 보다 좋은 정치란 공허한 정략으로 여야가 '누가 죽나 봅시다'는 식의 결전을 벌이는 게 결코 아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우리 정치를 4류라고 혹평했던 게 벌써 20년 가까이 돼 가지만, 지금이라도 좋은 정치를 펴나갈 이슈는 널려 있다. 당장 경제활성화법안과 공정경제법안의 처리에도 국민의 관심이 크고, 올바른 재정건전화 방안이나 게임중독 관련법을 두고도 각 당이 지지를 다툴 여지가 많다. 각 당이 진지한 정책 경쟁에 나선다면 국민은 충분히 옥석을 가릴 수준이 된다.
과거 미국의 엘 고어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선거패배 승복과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법' 관철 과정에서 좋은 정치의 토양을 본다. 국가통합을 위해 불필요한 시비의 여지를 스스로 포기하는 담대함, 더 큰 선(善)을 위해 굴욕스런 타협도 마다 않는 통 큰 지도력 같은 것 말이다. 그러잖아도 나라 안팎이 어수선하다. 이제부터라도 정치권이 좋은 정치에 나서길 촉구한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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