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달 25일로 출범 12주년을 맞았지만 '인권지킴이' 역할은 갈수록 후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9년 7월 현병철 위원장 취임 이후 정책권고와 실태조사 활동 등에서 뒷걸음치던 인권위는 급기야 긴급구제까지 사전 심의제로 바꿨다. 기존에는 긴급구제를 신청하면 무조건 상임위에 상정하도록 했으나 현장 조사부서에서 상정 여부를 결정할 수 있게 하면서 민감한 사안을 인권위가 회피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인권위가 발표한 '2012 인권통계'와 1일 한국일보가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확인한 '긴급구제 조치 건의 상임위원회 심의ㆍ의결 내역' 등에 따르면 2002~2006년 한해 1~3건이던 긴급구제 안건이 2007~2010년 6, 7건으로 늘었다. 하지만 2011년부터는 3년 연속 2건에 불과하다.
인권활동가들은 인권위에 대한 불신을 긴급구제 감소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2010년 8월 4대강 사업에 반대하던 환경운동가들이 경찰의 폭력행위 방치, 수면 방해 등을 이유로 낸 긴급구제 신청을 인권위가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대표적이다. 명숙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는 "2010년 상정된 6건의 긴급구제 요청 중 1건만 받아들여지면서 불신이 싹튼 듯하다"고 말했다. 인권위에 실망해 아예 긴급구제 신청을 하지 않았다는 분석이다.
활동가들은 2009년 7월 쌍용자동차와 2011년 한진중공업 사태가 인권위의 퇴행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꼽는다. 2009년만 해도 인권위는 "경찰이 식량 식수 가스 의약품 등 공급을 중단해 인권침해를 당하고 있다"는 쌍용차 노조 등의 주장에 대해 긴급구제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2011년 한진중공업 사태 때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낸 신청에 대해서는 비슷한 사안임에도 기각했다.
인권위는 올해 4월 급기야 긴급구제를 사실상 사전심의제로 바꿨다. 이는 최근 민주당 장하나 의원이 인권위 상임위의 4월 4일 비공개 의결자료(긴급구제 사건 처리절차와 기준 검토보고)를 공개하면서 뒤늦게 알려졌다. 올해 긴급구제 요청 5건 중 단 두 건이 상임위에 상정됐으나 조사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한 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밀양 송전탑 공사 반대 주민들, 법외노조 통보를 받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이 낸 신청은 상임위에 회부조차 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정책권고와 인권상황 실태조사 등 다른 활동도 축소된 것으로 나타났다. 민주당 정성호 의원이 최근 인권위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인권위의 정책권고 및 의견표명 건수는 2002~2005년 연평균 26.8회, 2006~2009년 32.8회였으나 현병철 위원장 취임 이후인 2010~2013년 9월까지는 22회에 그치고 있다. 정 의원은 "정책권고는 인권위의 핵심 업무 인데 최근 4년간 정책권고 횟수가 이전 4년보다 연평균 10회 이상 줄었다는 것은 인권위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방증"이라고 지적했다. 인권상황 실태조사도 2002~2006년 25건 안팎이었으나 2009년부터는 매년 7, 8건에 불과했다.
명숙 활동가는 "인권위는 정부나 국가기관이 위협을 느낄만한 사안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일반적인 진정 처리를 통해 적당한 수준의 발언만 하는 기구로 전락하고 있다"면서 "인권위가 인권 정책 수립에 대한 의지와 계획이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꼬집었다.
이런 지적에 대해 인권위 관계자는 "긴급구제에 해당하는 사건은 원래 자주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단순히 상임위 상정 건수가 줄었다고 해서 인권위에 책임이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며 "4월에 만든 처리 절차는 사안의 긴급성을 현장에서 엄밀히 조사해 일정한 상정 기준을 만들어 보자는 차원에서 마련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김경준기자 ultrakj75@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