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ㆍ엔 환율이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고 있다. 이른바 '양적 완화'에 따라 일본은행이 엔화를 대량으로 찍어내고 있는 데다 투기자금의 '엔저(低)' 베팅이 더해진 탓이다. 올 1년 동안 '엔저 공습'을 힘겹게 방어해 온 수출 대기업들이 긴장하며 총력 대응 태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1일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지난달 28일 100엔 당 원화의 재정 환율은 1,037.76원으로 5년 2개월 만에 최저치로 마감했다. 29일은 반등했지만 1,038.17원으로 약간 상승하는 수준에 그쳤다. 엔화 약세 속도는 최근 더 빨라져, 원ㆍ엔 환율은 11월 한 달 동안 4.7%나 급락했다. 우리 외환 당국이 원ㆍ달러 환율이 1,050원대에서 더 떨어지지 않도록 저지하고 있는데도 엔화 가치가 전보다 더 빨리 하락하고 있어, 당국으로서도 마땅한 대응수단이 없는 실정이다.
미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11월 중순 이후 10개 투자은행(IB)의 원·엔 환율 예측치는 내년 3분기 평균 100엔당 996.0원으로, 내년엔 900원대까지 떨어질 것이란 전망이 늘어나고 있다.
투기자금의 방향성에 강한 영향을 받는 엔화의 속성도 엔저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지난달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발간한 논문은 2008년 리먼사태 등 세계적으로 안전자산 선호 현상이 발생할 때 급격한 '엔고(高)'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가 직접적인 자금 유입에 의해서가 아니라 파생시장에서의 투기적 매매가 엔화 절상 쪽으로 돌아서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런데 이번엔 '엔저'를 기본으로 한 아베노믹스 정책이 국제 투기자금의 방향성을 엔화가치 하락으로 돌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실제로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주 "작년 말~올해 초 엔저에 베팅해 큰 이익을 얻은 거물급 펀드매니저 등 외국 투자가들이 다시 엔저에 베팅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아베노믹스가 진행된 올 1년간 국내 수출 대기업들은 선방해 왔다. SK증권 김효진 애널리스트는 '원고 엔저' 추세가 지속된 1년 동안 한국과 일본의 대미, 대중 수출액을 비교한 결과 일본 기업들에 비해 한국 기업들의 성과가 높게 나타났다고 밝혔다. 일본의 대미 수출은 엔저에도 불구하고 크게 늘지 않고 주춤해 있는 반면 한국은 꾸준히 늘었고, 대중 수출은 지난해 연말을 기점으로 한국이 오히려 일본을 앞질렀다. 특히 일본과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는 전기전자와 자동차 부문은 이미 해외 생산이 국내 생산보다 훨씬 많은 상태여서 직접적인 환율 영향이 크지 않다.
다만 일본 기업들 보다 한발 앞서 있는 전자 부문과 달리 도요타와 경쟁을 벌이는 자동차 부문은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달러 대비 엔화 가치가 급격히 떨어진 지난달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기아차 등 국내 자동차 메이커들의 주가는 약세를 보였다.
실제로 올해 상반기 일본 도요타는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비 97%나 늘어난 117억5,990만달러를 기록하며 영업이익률에서 현대차를 제치고 2위를 기록했다. 애널리스트들은 이를 도요타가 엔저로 인한 이익을 가격 공세에 투입하는 대신 엔고 시절 어려움을 겪었던 부분을 상쇄하고 내부 유보했기 때문으로 본다. 하지만 만약 내년에도 엔저가 지속될 경우 본격적인 가격 공세로 전환할 수 있고, 이 경우 국내 자동차업계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에 대해 현대기아차그룹 관계자는 "현대기아차는 환율이 10원 하락하면 약 2,000억원(현대차 1,200억원, 기아차 800억원)의 매출이 줄어드는 구조"라며 "환율 움직임에 대해 결제 통화 다양화, 해외생산 확대 등 다양한 전략으로 대응 중"이라고 밝혔다.
철강업계도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아직은 수익성에 타격을 주는 수준은 아니지만 엔저가 조금 더 속도를 낼 경우 일본 철강업체들이 가격경쟁력을 회복해 동남아 등 경합시장을 잠식할 수 있다는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나온다.
● 원ㆍ엔 재정환율: 국내 외환시장에서는 원화와 달러화만 직접 거래되기 때문에 제3국 통화와의 환율은 해당 통화가 달러화로 거래되는 환율을 비교 계산하여 2차적으로 구한다. 엔화 역시 원ㆍ달러 환율과 엔ㆍ달러 환율을 계산하여 구하며 이를 재정환율이라고 한다.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정민승기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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