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을 가지고 먹고 사는 일에 종사하다 보니 유독 언어에 민감하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출판계에서 널리 주고받는 농담처럼 노래방 가사와 길거리 광고판에서도 오자를 고치고 싶어지는 게 이 직업의 특성이니까 말이다. 이런 직업병을 출판계에서는 편집증(編輯症)이라 부르는데 원래 한자인 편집증(偏執症)을 살짝 바꿔서 스스로를 비하하는 농담이다. 직업이 이러하니 요즘 나 같은 직업인들은 남보다 훨씬 불행하고 고통스런 날들을 보내는 것 같아 몹시 억울하다. 오자도 아닌 말들이 오자보다 더 심각하게 우리의 언어생활을 망치고 있는 게 더 뼈저리게 느껴져서다. 국민 언어생활의 회복을 위해 아무도 안 읽을 책이나 만드는 것 빼고는 직업적 보람을 찾을 길이 없으니 실로 고통스럽다.
국민 언어생활을 해치는 말들은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다. 저 유명한 '종북'과 '내란음모'를 필두로 해서 애국 법치 민생 국민통합 분열조장 등등. 이 말들의 요즘 용례들을 보면 국어사전의 정의들을 몽땅 다시 써야 할 판이다. 처음에는 이런 말들을 '유체이탈 화법'이라 불렀는데, 언어란 사용빈도가 높아지면 예전에 없던 뜻도 추가가 되고 신조어가 되는 법이다. 국립국어원과 출판사들은 사전 개정을 서둘러야 한다.
이런 말들 가운데서도 금자탑은 '식민지'라든지 '인문학' 같은 말이다. 새로운 용례에 따르면 '식민지'는 '조국 근대화를 위한 불가피한 기회'로, '인문학'은 '창조경제에 필수불가결한 수단이자 국가관' 쯤으로 뜻이 바뀌어야 한다. 아, '인문학 융성'이란 말도 문과계 기초학문 말살을 위한 대학 구조조정 정책을 가리키는 뜻임을 이 참에 명심해두자. 또 '시간제 일자리 확대'라는 정책도 있는데, 창조경제의 사례로 나온 것이니 '창조'라는 말의 어의가 날로 풍부해지는 것 같아 반갑고 신난다. 저술가나 출판인이 제몫을 못하니 정부가 나서서 일을 덜어준다.
말이 현실의 사물이나 사건에 일대일 대응된다는 언어실증주의의 이론은 폐기된 지 오래인 바, 언어가 거꾸로 현실과 그에 대한 인식을 만든다는 구조주의 언어학의 지적이 유효해진 요즘이다. 제발 이 이론이 틀렸으면 좋겠는데 요즘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모양을 보면 그렇지가 않은 것 같다.
조지 오웰은 전체주의의 암울한 미래상을 그린 소설 에서 전체주의의 주요 수단으로 언어 조작을 든 바 있다. 거기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남처럼 이야기하는 유체이탈 화법이 '이중사고'란 말로 권장되고, 국가의 거짓 선전을 만들어내고 유포하는 기관은 '진리성'으로,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 국민 생활지침으로 강조된다. 소설 속 이야기 아니겠느냐고 반문한다면 다른 예를 들 수도 있다. 1961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유대인 학살책임자 아이히만의 재판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유명한 보고서다.
아렌트는 에서 '악의 평범성'과 '언어의 상투성'이라는 통찰을 제시하여 전체주의가 어떤 식으로 개인에게 스며드는지 고발한다. 나치는 유대인 이송을 '재정착', 학살을 '최종해결책'이나 '완전소개', 가스실 살해를 '안락사 제공'이라는 말로 부름으로써 언어규칙을 완전히 새로 썼고, 아이히만은 그런 말들을 통해 죄의식을 덜고 국가시책의 충실한 수행자로 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아이히만의 정신은 그런 문장들로 넘치도록 채워져 있었다." 아이히만이 정말로 생각이 없는 평범한 공무수행자였는지 교활한 출세주의자였는지는 나중에 재고할 만한 자료가 여럿 나왔지만, 언어가 현실에 대한 폭력적 수단이 될 수 있고 그런 언어의 무비판적인 수용자는 악의 평범한 수행자가 될 수 있다는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렌트는 이것을 '사고의 불능성'이라고 표현한다. 생각하지 않는 것은 범죄라는 것이다.
언어가 조작되고 이데올로기가 모르는 사이에 개개인에게 스며들고 마침내 사회 전체를 광기에 빠지게 하는 것은 특수한 예가 아니다. 생각하기를 싫어하고 사고의 불능성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국민이 있는 한.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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