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무늬 깔개 위에 야채들이 앙증맞게 놓였다. 한 단씩 팔리는 대파는 허리끈을 풀고 한 대씩 나눠졌고, 빨간 망에 담겼던 양파들도 우르르 몰려 나와 하나씩 자리를 잡았다. 고추, 감자도 한 개씩, 방울 토마토도 한 줌씩, 바나나도 한 송이만 따로 덩그렇고, 심지어 손톱만한 마늘까지 낱개로 그릇에 담겨있다. 마치 소꿉놀이하는 것 같다. 좌판 옆에는 입간판이 서 있었다. '1+1이 아닌 1÷10'. 하나 사면 하나 얹어주는 게 아니라, 하나를 열로 나눠 판다는 '개인주의 야채가게'다.
지난 7월 26일부터 11월 3일까지 서울 홍익대 인근 서교예술실험센터 앞에서 열린 '개인주의 야채가게' 는 서교예술실험센터 '소액다컴' 시즌2 선정작으로, 서울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진행된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한 유재인(28) 작가는 홍대 인근 가게에서 야채와 과일을 사서 낱개로 나누고 가격을 붙여 팔았다. 대파 한 대 250원, 바나나 한 개는 350원, 감자는 200원, 심지어 방울토마토와 청양고추도 1개에 100원씩, 마늘도 한 알에 50원에 팔았다.
왜, 야채가게였을까. "다르게 살고 싶고 새로운 것을 하고 싶은 나에게 왜 어른들은 똑같은 잣대로 판단하려고 하는지 못마땅했어요. 부자가 되는 건 관심도 없는데 말이죠." 대학 졸업 후 작업실에서 대부분 혼자 밥을 먹으면서, 스스로 가고자 하는 바와 사회가 원하는 자신의 모습 사이에서 고민한 끝에 내린 선택이 개인주의 야채가게라는 게 유씨의 설명이었다. "어른들은 우리보고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 며 바쁘면 컵라면으로 때우고 고생하는걸 당연하게 여기잖아요. 우리도 (현재를 희생하면서) 식사를 대충 때우지 말고 잘 해먹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1+1 행사가 소비자를 붙잡는 시장에서 혼자 잘 먹기란 재료 구입에서부터 난관에 부딪친다. 도무지 혼자 먹을 수 없는 양의 재료들은 항상 남아서 썩기 일쑤. 음식물 쓰레기 처리 역시 감각적ㆍ경제적ㆍ윤리적으로 불편한 일이다. 유씨는 "소비자 입장에서 모든 면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고 말했다. 다양한 재료를 소량으로 팔아서 버리지 않고 풍족한 식사가 가능하도록 해준 개인주의 야채가게는 1인 가구의 금전적, 정서적 알뜰함을 거든다는 마음을 넘어 현대 대량소비시스템을 향한 회심의 어깃장이었다.
100일간 이어진 이 '장사'로 그는 2만원 가량 밑졌다. 하지만 인근의 한 식당이 바통을 이어 2호점을 냈고, 학생들이 운영하는 서울대 자치카페에서도 동참 의사를 밝혔다.
결혼연령이 늦춰지고 비혼을 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이제 혼자 사는 삶은 낯설지 않은 도시 라이프스타일이 됐다. 이들은 '나홀로 식사'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에 동의하지 않는다. 1인 가구 네이버 카페 '마이로프트'를 운영하며 웹진 '루머스'를 운영하고 있는 옥수정(30) 대표는 "왜 혼자 밥 먹는 것을 두고 '때웠다' 고 표현하는지 알 수 없다" 고 말한다. 책을 읽거나 방송 드라마를 즐기면서 혼자 식사를 하는 것도 충분히 훌륭한 식사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혼자 먹는 게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했으면 빨리 누군가와 함께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을 거에요. 혼자면 서글프다는 편견을 넘어서면 혼자여서 멋진 삶이 열릴 수도 있죠." 부모님의 맞벌이로 어렸을 때부터 혼자 먹는 것에 익숙하고, 요리도 즐겨 한다는 백남재(27)씨는 "쪽방에서 허구한 날 라면으로 '끼니 때우며' 산 세대에게는 '나홀로 식사= 외로움ㆍ가난'이라는 선입견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외국 문화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은 기성세대와는 달리 혼자 간단한 식사를 하는데 거부감이 덜하다는 이야기다.
나만을 위해 정성껏 요리해서 호젓하게 혼자 즐기는 식사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만족감을 준다. 하지만 1인 가구에게 요리는 호사다. 설문조사에 응답한 1인 가구 555명 중 36%가 1주일 동안 단 한 번도 밥을 직접 지어 먹지 않았다고 답했다.
해외 대도시에서는 1인 가구를 겨냥한 먹거리 사업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시장조사기관인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1인 가구 비율이 전체 가구의 47%에 이르는 스웨덴의 경우 인구의 2%가 요리 레시피와 필요한 재료를 함께 보내주는 '미다스프리드'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이 사업모델의 영국 버전인 '헬로프레쉬'도 큰 인기를 누리고 있고, 한국에서도 '쿠킷'이란 이름으로 지난 9월 이 서비스가 시작됐다. 쿠킷은 스페인식 볶음밥인 빠에야, 일본의 소고기 감자조림인 니쿠자가 등을 요리할 수 있는 1인분의 재료와 레시피를 함께 서비스한다. 쿠킷의 임희경(26) 대표는 "1인 가구에 냄비와 과도만 있다고 가정하고 레시피를 만든다"며 "한 번쯤 특별한 요리를 해 먹고 싶은 이들을 위한 서비스 "라고 말했다. 각종 양념은 물론 식용유조차 제대로 갖춰놓지 않은 1인 가구를 위한 세심한 옵션도 첨가했다. 가령 니쿠자가를 주문하면 주 재료인 불고기와 감자 당근 양파 청양고추 마늘까지 딱 1인분용으로 배달되는데, 500원만 더 내면 식용유와 간장, 설탕 등 기본 양념키트까지 함께 온다. 니쿠자가 1인분 가격은 4,000원. 쿠킷은 재료의 50%는 재래시장인 경동시장에서 조달한다. 인기 메뉴는 빠에야, 니쿠자가 등의 특별한 요리와 사과 3개, 바나나 1/2송이, 귤5개로 1인분을 구성한 과일박스다. 특히 과일박스는 다양한 종류의 과일은 꿈도 못 꾸는 1인 가구에게 호응이 높아 재구매율도 높다.
혼자 맛있는 음식을 즐기다가도 때로는 여럿이 함께 모여 음식을 먹는 즐거움이 간절해질 때가 있다. 개인주의 야채가게를 시작한 유재인씨도, 혼자 밥 먹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옥수정씨도 입을 모아 "잘 먹으려면 같이 먹는 게 가장 좋다"고 말한다. 1인 가구 카페인 마이로프트는 '반상회'라는 이름으로 한 동네 사람들끼리 밥 먹는 모임을 만들었다. 작년 3월 함께 모여 식사하는 모임으로 시작한 소셜다이닝 '집밥'의 누적 모임 수는 현재 약 1640개, 매주 60여 개의 모임이 진행된다. 이들은 주말 저녁 모여 수제맥주와 컵케익을 만들어 나눠먹기도 하고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기도 한다. 집밥의 박인(27) 대표는 "자기 이야기를 할 곳이 없는 1인 가구 구성원들이 모임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이 집밥 모임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지난 23일, 토요일 오전 서울 마포구 연남동 생활창작공간 '새끼'에서는 '구루의 김치교실'이 열렸다. 동네 주민 10여 명이 모여 함께 김장을 담그는 거였다. 테이블을 둘러 서서 누구는 배추를 다듬고, 또 누구는 당근 등 속재료를 썰고…. 혼자서는 엄두조차 낼 수 없는 1인 가구 요리의 '끝판 대장' 김장도 그들은 라면 끓이듯 거뜬히 해내고 있었다.
준비물은 참가비와 앞치마, 그리고 김치를 담아갈 수 있는 통 하나. 능숙한 솜씨로 야채들을 썰던 자취 10년차인 조아라(30)씨는 "김장은 자취 생활의 마스터 단계 같은 느낌"이라며 "김치는 엄마에게 항상 받아서 먹다가 처음 만드는데 함께 이야기하면서 만드니 생각보다 쉽다"고 말했다. "우리 집은 당근을 넣는데." "우리 집은 새우젓을 많이 넣어." 집안 문화에 각자의 추억까지 고스란히 녹아있는 '우리 집' 김치 이야기에 손은 종종 쉬지만 왁자한 대화와 웃음소리는 끊일 새가 없다. 미리 절여 둔 배추에 갖은 야채와 양념으로 속을 버무려 채우면 김장김치 한 포기가 뚝딱 완성된다. 김치 교실을 연 푸드 디자이너 '구루'씨는 "혼자 사는 사람은 배추 한 포기를 사서 반은 김치를 담가 한 달 동안 먹고, 나머지는 배추전, 물김치 등 다른 요리를 하면 좋다"며 "가장 좋은 것은 친구 서넛이 모여 김치를 담근 뒤 수육도 삶아 함께 맛있게 먹고 나머지 김치를 나눠 가져가는 것" 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직접 담근 김치 한 포기를 뿌듯하게 바라보던 조씨는 "다음 번엔 사과를 넣어볼까"하며 웃었다.
박소영기자 sosyo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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