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들에게는 서로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저절로 생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야기는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함께 경험한다는 뜻이다."('파주로' 중)
김연수(43)의 다섯 번째 소설집 에는 통증과 고통이 있고, 죽음-주로 노쇠와 질병으로 인한-이 있다. 단지 있는 것이 아니라 도처에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압도적으로 '이야기'가 있다. 유머와 농담을 삶의 이데올로기로 견지한 듯 보이는 김연수의 인물들은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그 '이야기'는 종내 하나의 애잔한 깨달음을 야기한다. 이야기야말로 우리가 스스로의 삶을 복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론이며,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한번 더 이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이 소설집의 가장 아름다운 단편일 '주쌩뚜디피니를 듣던 터널의 밤'에서 독신의 큰누나는 20년간 일한 대학병원의 간호사 일을 그만두고 새로 마련한 아파트로 암에 걸린 노모를 모셔간다. 어머니는 처녀 시절부터 입던 옷가지들을 버리기 아깝다며 한 보따리 싸들고 오고, 버리네 마네, 모녀 사이에는 작은 실랑이가 인다. 노모는 급기야 "아까워서 잘 안 입었던 옷들도 있으니 한 번씩 입어보고 버리겠다"는 타협안을 내놓고, 큰누나는 삼각대 위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매일 같은 자리에서 다른 옷을 입은 엄마의 사진을 찍는다.
"LCD 화면에 비친 엄마는 입는 옷에 따라서 삼십대였다가 오십대였다가 또 사십대가 되었다. 엄마에게는 당연했겠지만, 큰누나에게도 그 옷들 하나하나에는 추억들이 있었다. 그래서 엄마가 그날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서 큰누나 역시 여중생이었다가, 지방 종합병원에 실습을 나간 간호대 학생이었다가, 여고생이었다가… 아무튼 두 사람은 그 겨우내 인생의 시간을 종횡무진 가로질렀다. …장례를 치르고 난 뒤, 그간 갖가지 옷들을 입고 찍은 엄마의 사진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다가 큰누나는 그 사진을 찍는 동안 두 사람이 인생을 한번 더 산 셈이라는 걸 알게 됐다고 한다.""
엄마의 모습 뒤로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은 딸을 기리기 위해 한 아버지가 기부한 돈으로 도서관 건물이 건립되고 있었고, 큰누나는 엄마의 사후에도 매일 같은 자리에서 사진을 찍기를 계속했다. 그 사진들을 날짜별로 모아 재빠르게 넘겨본다면 아마도 건물이 올라가는 하나의 동영상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냥 아침마다 엄마 뒤에서 올라가던 그 건물이, 엄마가 없는 지금도 씩씩하게 지어진다는 사실이 나를 위로했나봐."우리는 서로 연결돼 있고, 삶은 지속된다는 것. 우리는 결국 거기에서 위안을 얻을 수밖에 없다고 작가는 넌지시 속삭인다.
이야기는 다른 작품들에서도 계속된다. 표제작 '사월의 미, 칠월의 솔'에서는 유부남과의 첫사랑에 실패하고 미국으로 이민 간 이모의 '이야기'가(그 남자와 숨어살던 함석집 지붕 위로 사월에는 미 음계의, 칠월에는 솔 음계의 빗소리가 떨어지곤 했다), '벚꽃새해'에선 배움이 짧아 한이 됐던 황학동 시곗방 할아버지가 아내에게 들려주는 역사책 '이야기'가(늙은 아내가 코를 골고 잠에 떨어진 후에도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오래 이어졌다),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에서는 83세가 된 1950년대의 잊혀진 소설가 들려주는 죽기 전의 마지막 고백의 이야기(이별의 고통을 이기려 멀쩡한 어금니를 뽑아야 했던 젊은 사내는 인간이 괴로운 것은 자기 경험의 주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임을 깨닫는다. 실연이 괴로운 것은 내가 이제는 그녀를 사랑하던 시절의 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가 이어진다.
올해로 등단 20주년을 맞는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 소설가가 등장하는 가족 이야기를 많이 썼다. "내가 신간을 펴낼 때마다 자기 일처럼 좋아하던 사람들 중 몇몇이 이제 더 이상 나의 새 책을 읽을 수가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 이상하기만 하다. 어째서 그런 것일 까? 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일까?" 존재의 본적지였을 이들이 하나 둘 이 세계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며 무기력에 잠식됐던 시간이 빈번했었으리라는 추측이다. 하지만 위로로 점철된 이 소설집을 읽으며 독자는 이기적이게도 어떤 안도감을 느낄 것이다. 이런 작가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것은 꽤 근사한 일일 것이라는 아마도 그런.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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