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대한민국을 얘기하기 위해, 10년 전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울프상의 시상식 소동을 반추해 보고 싶어졌다. 노벨상의 아성에 도전하며 이스라엘이 야심차게 추진한 울프상은 그 해 수상자로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을 선정했다. 베를린 국립 오페라단과 시카고 필하모닉을 이끌며 '유대인'의 우수한 음악성을 널리 떨치는가 하면,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를 통해 인류애를 실천하는 등 '이스라엘이 낳은' 위대한 음악가라는 것이 그 선정 이유였다. 시상식은 이스라엘 의회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허나 연단에 오른 바렌보임이 수상소감을 결연히 토로하자 식장은 일대 소란에 휩싸였다. 마이크를 넘겨받은 교육문화장관은 핏대를 높여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그는 이 연단을 국가를 공격할 기회로 삼았다!" 과연 그랬을까? 수상소감의 내용을 밝히기 전에 우선 바렌보임이라는 인물의 각별한 배경부터 언급해 둘 필요가 있다.
그의 태생과 성장은 복잡하다. 부모는 나치의 침략을 피해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던 러시아계 유대인이었다. 이스라엘 건국 후 예루살렘에 정착할 즈음 바렌보임은 피아노의 신동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소년은 곧 유럽으로 활동반경을 넓혀 갔는데, 이 시기 베를린 필의 지휘자였던 푸르트뱅글러의 연주 초청을 거부했던 일화가 유명하다. 아직 홀로코스트의 상흔을 잊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청년 음악가로 성장한 그는 영국의 국민요정과 같던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뒤 프레는 이 청년과의 결혼을 위해 유대교로의 개종도 서슴지 않았다. 중동전쟁이 일어났던 때, 바렌보임은 온갖 연주 스케줄을 뒤로한 채 이스라엘로 달려가 전쟁의 참상을 직접 체험하기도 한다. 이후 유대계의 지원을 등에 업고 서유럽과 북미의 주요 오케스트라를 거치며 지휘자로도 세계적 명성을 높여갔다.
이처럼 음악계에서 승승장구하던 유대 민족주의자가 어느덧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이중국적을 소유한 최초의 지구인이 된 까닭은 무엇일까? 테러와 암살, 선혈이 낭자하는 적진의 한복판에서 목숨을 내걸고 음악회를 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종교와 민족, 언어가 다른 데다 내 가족이 상대편의 총탄에 죽었다는 분노를 뜨겁게 삼키고 있는 중동의 청년 음악가들을 굳이 오케스트라로 규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바렌보임은 이 모든 해답을 에드워드 사이드와의 운명적 만남 덕택이라 회고한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세계적 석학인 사이드는 이란 명저로도 알려져 있다. 두 사람 사이 경계를 허문 교류와 마음을 나눈 우정이 없었더라면 '서동시집 오케스트라'의 유의미한 역사는 영영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자, 다시 울프상으로 돌아가 수상소감의 몇 구절을 옮겨보자.
"제 나이 열 살 때, 이스라엘로 이주해왔습니다. 그때의 독립선언문을 인용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신앙, 인종,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이에게 사회적 권리와 정치적 권리를 보장한다.' 그러나 저는 현재 상황을 반문하고 싶습니다. 남의 땅을 점령하고 그 국민을 지배하는 것이 선언문의 정신에 부합할까요? 고난과 박해의 역사를 겪었다 해서 이웃 국가의 기본권을 침해하거나 고통을 야기할 면죄부를 얻은 것일까요? 오직 군사적 폭력만이 분쟁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전 제 자신을 꾸짖습니다. 왜 진작 평화적인 해결책을 모색하지 못했던가? 우리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자신을 꾸짖으며, 스스로에게 질문한다'는 바렌보임의 언급은 2013년의 우리가 진심을 다해 경청해야 할 대목이다.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지 않으면, 내편이 아니라며 덮어놓고 매도 당하는 작금 이 나라의 실정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을 반성할 줄 모르고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지 않는 사람들에겐 특히나 바렌보임과 사이드의 대담집 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아니면 여기 수상식 장면이라도….
울프상 수상식 : http://youtu.be/t9HwB5XDnes
조은아 피아니스트ㆍ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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