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모범국가 하면 흔히 독일이나 프랑스 같은 서유럽 선진국이나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같은 북유럽 복지국가들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잘 된 겉모습만 보고 따라가기에 이 나라들과 우리는 문화적 전통이나 역사적 경험, 당면한 사회문제의 우선 순위가 다르다. 심지어 의식 수준에서도 차이가 난다.
빈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연세대 교수를 정년퇴임한 안병영 전 교육 부총리가 유독 오스트리아를 주목하는 것은 오스트리아의 문화적 전통이나 국민의식이 한국과 닮았기 때문이 아니다. '대타협'이나 '합의와 상생'을 정치에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오스트리아를 모델로 삼아 배우자는 제언을 담은 이 책은 그래서 애초부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오스트리아의 경험이 우리 문제의 모범답안 같은 것일 리 없는데다, 독일에서 보고 배울 것이 없는 것도 아니고 북유럽 국가들에서 참고할만한 것도 없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남한 보다 조금 작은 면적에 인구 1,000만명에 못 미치는 오스트리아가 반세기 넘게 정치적으로도 안정되었고 경제성장을 이어가며 모범적인 복지정책을 펴가는 '강소국'이 될 수 있는 비결인 '대타협'이라는 키워드 자체에 있다. '날이 갈수록 중도는 빈약'해지는 한국의 현실을 두고 그는 '중도적 공론의 장이 실종되면 합의적 개혁정치도 함께 표류한다'며 "양극정치, 교착과 불임정치의 악순환이 장기화되는 한 남북한 간의 획기적 개선도,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도, 노사간의 사회평화도, 그리고 최선진국으로의 진입도 기대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대입가능성 여부를 떠나 '중도개혁 정치'를 통해 국가적 난제를 성공적으로 풀고 있는 오스트리아가 참고가 될 것으로 저자가 믿는 데는 오스트리아의 근현대사 경험이 우리와 비슷하다는 점이 작용한다. 저자에 따르면 오스트리아는 서구의 변방으로 동서의 교차로에 있으면서 자유주의의 세례나 산업화, 민주화 같은 것들이 다른 서구 국가들에 비해 뒤졌다. 권위주의적이고 온정주의적 엘리트주의적인 정치문화가 여전히 남아 있다. 민주화의 단초가 양차 세계대전이라는 외부의 충격으로 마련됐으며, 약소국으로서 경제적인 생존 전략을 끊임없이 고심해 왔다.
그리고 그런 약점과 시련 속에서 중립화 통일을 이뤄냈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수준의 경제발전, 정치적 민주화, 노사협력, 복지국가 건설을 해냈다며 저자는 이 과정이야말로 '우리에게 적합한 제3의 중도통합형 모델'이라고 말한다.
그 같은 모델이 독일이나 북유럽 국가들과 본질에서 얼마나 다른 것인지는 이 책에서 분명하지 않지만 어쨌든 저자는 오스트리아의 성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두 가지를 꼽는다. 갈등과 경쟁보다 타협과 합의를 중시하는 정치의 합의제적 성격과 주요 경제이익집단 특히 노사를 대표하는 집단들이 상호간 그리고 정부와 더불어 협의체제를 구축하고 국가의 정책 결정과정, 사회 및 경제정책 결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사회적 파트너십'이다.
전쟁이 아니라 결혼으로 유럽에 대제국을 건설한 합스부르크가의 핏줄이 흐르는 오스트리아의 정치 엘리트들은 극단적ㆍ교조적인 이념에서 벗어나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온건한 이념적 성향을 지녔고 실용적인 타협을 선호해왔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이 같은 대화를 뒷받침하는 것은 가입이 의무가 되어 있는 노동자, 사용자, 농민 등을 대표하는 거대 이익단체와 이 조직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라고 설명한다.
이념을 고집하기 보다 상대를 존중하고 합리적인 합의를 선호하는 정치문화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이 책이 나온 시점이 절묘하다. 이런 사례들을 참고해 변화가 생기고 그래서 이 책이 두고두고 읽히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까지 해보지만 어째 쉽지 않을 것 같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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