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연 통한 이기적 유전자보다 공동체 위해 일하는 성향을집단이 선택해 다음 세대로 전달
1897년 말 화가 폴 고갱은 타히티 푸나아우이아 언덕에서 자신의 종말을 기다리고 있다. 기력은 다했고 가족이 죽었기에 스스로 죽음을 준비하는 중이다. 폭 3.65m에 달하는 거대한 그림, 고갱은 이 그림에서 붓을 떼면 목숨이 다할 것임을 알고 있다. 죽음을 앞에 둔 세계적인 화가는 그림을 완성해가며 인간 조건의 토대를 들여다본다. 마치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 호숫가 오두막에서 삶의 본질을 꿰뚫어 봤듯이, 그는 단순하지만 사회의 모든 구성 요소를 갖춘 원시성의 타히티를 화폭에 담으며 역사 이래 철학이란 도구에 의지해 인류가 끝없이 헛손질했던 거대한 질문들과 마주한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이 그림의 제목이기도 한 3가지 질문. 마치 인간의 삶의 주기를 순서에 따라 배열한듯한 그의 그림에는 진화사회학의 정수가 오롯이 담겨있다.
사회생물학의 창시자이며 와 로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에드워드 윌슨이 인간 본성과 진화의 본질을 통섭적으로 엮어낸 이 책은 고갱이 남긴 위의 세 가지 질문들에서 출발한다. 윌슨은 사회성을 무기로 앞세워 6,000만년 전 지구 정복을 완수한 개미 등 다양한 곤충 집단의 진화와 함께 인간이 지구 생태계의 정점에 서게 된 과정을 인문, 사회과학, 예술, 자연과학을 동원해 풀어간다.
이 책을 통해 윌슨은 다시 한 번 생물학계의 '투사'라는 이미지를 굳혔다. 사회성 생명의 역사를 '집단 선택 이론'의 관점에서 재구축한 것이다. 이는 인류 문명사를 바라보는 시야를 민족, 인종, 또는 인류라는 작은 종족주의 범주로 가둬놓았던 낡은 세계관을 총체적으로 흔들었다. 지금까지 진화생물학의 대세였던 이른바 이기적 유전자로 설명되는 혈연 선택 이론에 대한 도전인 셈이다. 저자는 곤충 집단과 인류가 고도의 사회성, 즉 진사회성을 갖춘 개체로 진화하는 데 있어 혈연 선택이 아닌 집단의 선택을 통해 이기적 유전자뿐 아니라 조직을 위한 이타적 유전자를 아래 세대로 전달해왔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이제 철학이 아닌 과학의 힘으로 찾아낼 수 있게 됐다고 말하며 선행 인류가 밟아온 진화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수백만 년 전 영장류가 진화의 미로를 헤매다 막다른 골목에서 길을 찾아 나가는 과정을 직립 보행과 불의 사용, 그리고 육식을 하게 되면서 공동체의 중요성을 깨달은 순간으로 각각 나눠 보여준다. 건조한 사바나 지역에서 날씨에 따라 구하기 힘들어질 수 있는 열매나 풀을 먹던 인류는 사냥만 잘한다면 채식보다 쉽게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육식의 식습관을 갖도록 진화했고, 집단을 위해 혈연이 아니라도 이웃 간에 이타적인 행동을 앞세우는 방향으로, 즉 집단 선택에 의해 진화의 사다리를 올랐다고 설명한다.
집단 선택과 개체 선택의 상호작용이 빚어낸 공동체를 중시하는 고도의 사회성이야말로 인류가 현재 지구 정복자로 우뚝 설 수 있게 한 혁명적인 힘이었다고 책은 거듭 밝힌다. 윌슨은 단지 이러한 논쟁거리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사회성 진화가 인류 문화 곳곳에 남긴 흔적들을 추적한다. 그는 근친상간 회피나 색 이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인간 본성에 새겨진 유전자의 영향들을 소개하고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에 대해 최근 인지 고고학이 밝혀낸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인간 지능의 발전 과정을 들려준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윌슨의 전망은 비관적이다. 생태주의자로 오래도록 생물 다양성 보호를 주장해온 그는 또 다른 지구의 정복자인 개미와 달리 인류는 자신들이 살아갈 지구 생명권을 파괴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서로에 예의를 차려야 한다는 소박한 윤리관, 이성을 가차 없이 적용해야 한다는 지적 태도, 그리고 우리가 진정 무엇인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갖는다면 우리가 처한 문제를 풀 수 있다는 말도 덧붙인다. 책의 감수를 맡은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윌슨이 일관되게 추구해 온 사회성 진화에 관한 이론을 지구 생태계에서 가장 화려하게 성공한 인간과 사회성 곤충에 적용해 지구 역사를 재구성한 역작"이라고 평했다.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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