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구의회 의원 중에 고기판이라는 분이 있다. 고기를 굽는 판인지, 고기를 판 사람인지 헷갈릴 만한 이름이다. 3선의원인 그는 영등포구의회 부의장으로 활동 중인데, 최근엔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언론인연합회가 수여하는 ‘2013 한국을 빛낸 자랑스러운 한국인 대상’(공직 부문)도 받았다. 기억하기 좋은 이름이어서 선거 때는 덕도 좀 봤을 것이다. 축산업 식육업, 이런 일을 하지 않고 정치하기를 정말 잘했다.
세상엔 이상하고 재미있는 이름이 많다. 그 자체로는 아무 이상이 없는데 성과 어울리면 엉뚱하게 의미가 변질되는 경우도 참 많다. 강도범, 임신중, 사기범, 방귀녀, 안아주, 박아지, 최첨단, 추미남과 같은 이름은 성만 다르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이름이다.
김개년이라는 이름은 아무리 성을 바꿔봤자(바꿀 수도 없고) 그게 그거지만. 그래서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이름을 고치겠다고 법원에 개명 신청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소설가 박완서(1931~2011) 씨의 이름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자전을 찾아가며 머리를 맞대고 고심한 끝에 婉(순할 완)緖(실마리 서)라고 지은 것이라고 한다. 緖는 돌림자이니 婉자 하나를 찾아내려고 그렇게 공을 들인 셈이다. 너무 쓰기 복잡해 어려서 그 이름을 싫어했던 박완서 씨는 나중에 그 이름에서 할아버지, 너무 일찍 세상을 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했다고 한다.
부모는 누구나 자식에게 사랑스럽고 예쁜 이름을 지어주려 하는데, 강도범 임신중과 같은 경우는 왜 그렇게 작명을 한 것일까. 부모가 무심한 탓인가? 1994년 일본에서는 ‘악마’라는 이름 때문에 시끄러웠던 일이 있다. 한 부부가 장남의 이름을 ‘악마’라고 지어 출생 신고를 하자 시는 법무성에 수리 여부를 조회했다.
법무성이 사회 통념상 문제가 있다며 접수하지 말라고 하자 부부는 도쿄 가정재판소에 이의를 신청했고,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하지만 여론이 나빠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고 한다. 남들에게 쉽게 기억되고 강하게 자라기를 바라고 지었다는 이름인데, 뭐라고 바꿨는지는 모르겠다.
이렇게 이름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며칠 전 병원에서 정기 검진을 받는 동안 재미있는 이름을 몇 가지 보았기 때문이다. 우선 고정란이라는 여의사. 하루 종일, 매일같이 하는 일이 남의 손과 발을 만져보고 두드려보아 이상이 없는지 살펴보는 건데, 그 검사를 받으면서 ‘고정적으로 이 일만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었다.
왜 웃느냐기에 기분 나쁘지 않게 내 생각을 말했더니 자기도 따라 웃었다. 그 다음, 엑스레이를 찍으러 갔을 때는 ‘문화인’이라는 여직원이 접수를 하고 있었다. 남들은 다 비문화인이고 자기만 문화인이라고 주장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용모는 진짜 문화인처럼 보였다.
시간이 좀 남아 컴퓨터가 있는 영안실 주변에 갔을 때는 사망자 명단에서 ‘성외출’이라는 할머니의 이름을 보게 됐다. 죽는 게 외출일까? 아마 그분은 외갓집에서 태어나 그런 이름을 얻었겠지만, 이 세상에 온 게 외출이고 이 세상을 떠나는 건 외출이 아니라 귀환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컴퓨터로 ‘웃기는 이름’을 검색해보니 어느 병원엔가 ‘고추서’라는 전문의 이름사진이 나오는데, 하필이면 산부인과 의사였다. ‘고추서’도 문제이지만 ‘노상서’라면 산부인과 의사로 더욱 더 안 어울릴 것이다. 개인택시 운전을 하는 ‘김시발’이라는 사람도 있었다(시발택시로 운송업을 시작했나?). ‘가득염’ SK와이번스 투수는 주유소에 가서 기름 넣을 때 유용한 이름처럼 보였다.
그리고, ‘황(黃금)독수리 세상을 놀라게 하다’라는 경북 예천의 남성과 ‘박(朴)하늘 별님 구름 햇님보다 사랑스러우리’라는 서울의 한 여성은 뭐라고 줄여서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1970년대에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TV프로그램에서 구봉서와 배삼룡이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동방삭 치치카포 사리사리센타 워리워리세브리캉 무두셀라 구름이 허리케인 담벼락 서생원에 고양이 바둑이는 돌돌이’라고 읊어대던 긴 이름이 생각났다.
그거 참 재미있네 싶어서 의사 명단 안내판을 10여분 동안 일부러 다 읽어보았다(참 할 일도 없다!). 그 병원에는 저명인사들이 의외로 많았다. 혈관외과에 조용필, 간이식 간담도외과에 안철수, 치과에 고현정 김수환, 방사선종양학과에 송시열, 이런 분들이 혁혁하게 병원을 빛내고 있었다. 비뇨기과엔 유달산이 우뚝하고 식도암팀에서는 박숙련이라는 숙련된 의사가 오늘도 열심히 환자들을 진료하고 있었다. 산부인과의 김암이라는 분은 아무래도 의사 이름으로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았다.
결론:
1)이름은 누구나 듣기 좋고 기억하기 좋게 지어야 한다.
2)지나치게 거창하거나 지나치게 아름답거나 지나치게 강하거나 지나치게 긴 이름은 좋지 않다.
3)성과 이름의 조합을 잘 살펴봐야 한다. 도씨 성을 가진 사람은 박사가 되면 도박사가 될 수밖에 없고, 성이 조씨나 부씨인 사람은 아무리 정교수가 되더라도 조교수나 부교수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운명의 장난을 잘 이해해야 할 것이로다.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 fusedt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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