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었던 사람에 대한 배신, 햄릿이 겪는 끔찍한 외로움현대인 고민과 다를 바 없어그는 미친 척한 게 아니라 미칠 수밖에 없었던 거죠햄릿의 감정에 몰입하면 곧 죽을 것 같다는 느낌도극 중 유명한 독백 장면, 객석과 공유하는 형태로…"
햄릿을 연기한다는 것은 남자 배우들의 공통된 꿈이라고 한다. 한 남자가 품고 살았으리라 믿어지지 않는 햄릿의 엄청난 분노와 슬픔을 2시간여의 무대에서 활활 태울 수 있다면 배우가 된 자로서 아쉬울 게 없을 것이란 말들도 많이 한다. 햄릿처럼 극적으로 인생을 마감한 남자가 몇이나 있으랴. 그처럼 무거운 고민으로 심장을 날카롭게 베어냈던 배역이 또 있으랴. 영웅일 수도, 혹은 유약하기 짝이 없는 패배자일 수도 있는 그는 분명 우리 시대 모든 남자의 다른 모습일 게다.
12월 4일부터 29일까지 연극 '햄릿'(연출 오경택)의 햄릿으로 서울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오르는 배우 정보석(51)에게도 햄릿이란 배역은 30년 연기 인생의 꿈이었다. 26일 서울 대학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전 세대가 공감하는 외로운 햄릿을 마음속에 붙들어 놓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젠 햄릿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더 나이가 들면 이런 무대가 불가능할 거란 우려도 앞섰고요. 그래서 5, 6년 전부터 만나는 연극계 인사들에게 '햄릿을 하고 싶다'고 소문을 내고 다녔죠. 인연이 닿아 일정이 잡힌 게 벌써 지난해 연말이니 거의 1년을 햄릿에 매달린 셈이네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가운데 주인공 집중도가 제일 높으며 대사량 또한 가장 많아서 햄릿의 연기는 누가 해도 완벽할 수 없으며 캐릭터를 완성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그 배후에 삼촌 클로디어스(남명렬)와 '상복을 벗자마자 그의 침실로 향한' 어머니 거트루드(서주희)가 있음을 알게 된 무대 위 햄릿은 인간군상이 지닌 모든 감정과 격정을 드러내야 한다.
"햄릿을 대표하는 일종의 심상이 있다고 짐작했던 거죠. 그래서 나름 자신감이 생겼던 것이고요. 그런데 막상 연습에 들어가니 그게 아니더군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나섰는데, 겁나기도 하고요. 그냥 꿈으로 남겨둘 거란 후회도 했고요." 연습이 시작된 뒤 그에게 '어떤 햄릿을 무대에 올려야 하느냐'는 질문과 두려움이 솟아났고, 이는 너무나 많은 가능성과 열린 공간을 배태한 '햄릿'이란 캐릭터에 더욱 집중토록 이끌었다. "햄릿이 가진 외로움을 잡아내고 싶어요. 당연히 내 편이라 믿었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내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햄릿은 끔찍한 외로움과 맞서게 되죠. 외로운 사람, 휴대폰에 전화번호 수백 개를 저장하고 살지만 정작 필요할 때 연락할 이 하나 없는 우리와 다름없어요. 이건 사실 어느 세대에 특별히 더 어필하는 문제가 아니죠. 10대나 70대나 결국 사람에 대한 고민이 가장 큰 화두이니까요."
햄릿은 미친 척하거나 혹은 반 정도 미친 사람으로 그려진다. '미쳤다'는 감정상태를 어느 정도 심각하게 그려내느냐가 '햄릿' 전체를 규정짓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햄릿이 미친 척하는 것이라지만 그의 상황이라면 정말 미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순간적인 격정을 햄릿은 계속 붙들고 있어요. 이런 연기는 감정이 파고들어 와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몰려와요."
'햄릿'은 질문이 많은 연극이다. 이번 '햄릿'은 양복을 입은 햄릿, 무대 위 걸리는 금속판들로 현대적으로 해석된 공연이면서도 원작을 건드리지 않은 정통극이다. 그래서 객석은 수많은 질문과 마주치게 된다. "넌 누구냐, 살면서 과연 나는 한 번이라도 이 질문에 답을 한 적이 있느냐. 이게 연출과 저를 포함한 출연진이 동의한 극의 화두입니다. 극장을 나서면서 관객들이 이 질문을 하나씩 갖고 돌아가길 바랍니다. 이런 의미로 극중 햄릿의 유명한 독백 장면을 객석과 공유하는 형태로 풀어갑니다. 형식은 밝힐 수 없어요. 스포일러가 되니까요."
정보석은 얼마 전 오필리어(전경수)를 들어 올리는 연습을 하다 넘어져 어깨와 허리를 다쳤다. "통증이라도 없애자며 주사를 맞으며 견디고 있어요. 이렇게 열심히 살아온 적이 있나 할 정도예요. 몸무게가 평소보다 5㎏이나 빠져 젊은 햄릿 연기하기 좋은 몸이 된 건 잘됐다 싶어요."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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