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이웃나라 예멘으로 도망쳤다가 불법 입국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여성에게 국제적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인권단체들은 명예살인 등의 우려를 들어 여성의 강제송환에 반대하고 있지만 예멘은 사우디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높아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이다.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불리는 이 사건의 당사자는 사우디 여성 후다 알 나이란(22)과 예멘 남성 아라파트 무함마드 타하르(25). 알 나이란은 사우디에서 일하던 타하르와 3년 전 만나 교제해왔지만 부모는 정혼자가 따로 있다며 결혼에 반대했다. 가출을 감행한 알 나이란은 취업자를 가장해 타하르와 국경을 넘다가 예멘 당국에 체포돼 외국인보호소에 구금됐다. 예멘 국적인 타하르는 곧 혐의를 벗었지만 여자친구와 함께 있겠다며 석방을 거부했다.
24일 예멘 수도 사나의 법원에서 열린 공판에 차도르(얼굴 외에 전신을 가리는 무슬림 여성 전통 복장) 차림으로 출석한 알 나이란은 사우디 대사관의 변호인 주선 제의를 거절하고 현지 시민단체 후드가 추천한 변호사를 선임했다. 사우디 측 변호사는 자신에게 귀국을 종용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선임된 압델 라키브 알 카디 변호사는 "사우디가 예멘 정부에 알 나이란을 돌려보내라고 압력을 넣고 있다"며 "사우디 정부는 인도주의적 사건을 두고 양국의 긴장을 부추겨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날 법원 앞에서는 '우리는 모두 후다다'라는 글귀가 쓰인 머리띠를 두른 시위대들이 알 나이란을 추방하지 말 것을 요구하며 농성했다.
한편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 예멘 지부는 알 나이란이 망명 신청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UNHCR 관계자는 "알 나이란이 가족에게 돌려보내질 경우 심한 경우 죽임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망명 신청은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 인권단체 휴먼라이트워치도 "알 나이란이 과거 가족들에게 매질을 당한 적이 있다"며 추방 반대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유엔 회원국이 UNHCR의 판정을 받아들일 의무가 없기 때문에 예멘 정부가 알 나이란을 적극 보호할지는 미지수다. BBC방송은 "예멘 근로자 수십만명이 사우디에서 취업해 있는 등 경제적 예속 상황에서 예멘 정부가 사우디의 송환 요구를 거절하기 부담스러울 것"이라면서도 "최근 사우디에서 외국인 근로자 추방 캠페인이 대대적으로 벌어지면서 예멘에서 반(反)사우디 정서가 높아지고 있는 점이 변수"라고 지적했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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