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 짓이기고, 물감 짓누르고사제로 만난 며느리 유화작가 활동극과 극의 소재 사용하지만원초적인 유희성 보여 주는 점 닮은꼴● 기록 예술에 빠진 아들 동훈씨스포츠 선수들의 찰나의 순간 그림으로현장의 아우라 포착 독특한 실험예술-현재가 만나는 스토리텔링 작업● 전통 한지 원주서 제2 의 꿈고향 춘천에 설립한 한지 스튜디오 이어한지테마파크 세워 3인 작품 전시"한국 한지가 세계 최고임을 알릴 것"한중일 합작 'Paper Road' 방송 제작 중
각종 물감, 어지러이 널려진 화구는 여느 화실에서건 볼 수 있다. 그러나 시선을 잡아 끄는 것은 빼곡한 한지 더미, 닥나무, 붓글씨가 씌어진 종이 따위가 발하는 독특한 기운이다. 여느 화실에 자욱한 오일 냄새 대신 식물성 재질이 저희들끼리 어울려 빚어내는 풀(草) 냄새가 사람의 마음을 다독여 준다.
한지 화가 함섭(71)씨의 작업은 빨래 방망이를 무수히 두드려 표백시키는 전통의 세탁 방식을 닮아 있다. 특히 고서를 무수하게 두드려 검은 먹의 글자만 오롯이 떠오르게 하는 특유의 기법은 서구인들에게는 경이의 대상이다.
2007년 스페인 아트페어에서 한국이 초빙국으로 선정됐을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 부부 옆에서 구경하던 소피아 왕비는 그의 그림을 가리켜 "가장 훌륭한 한국 작품"이라 했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들고 간 10점이 다 매진됐다. 앞서 2002년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제 33회 아트페어는 그를 백남준, 이우환 등 기라성 같은 한국 작가 9명과 함께 대표적 작가로 선정했다. 그 대회에 나갔던 작품들 역시 매진.
시장의 언어로 그를 묘사하는 일은 아무래도 왠지 강퍅하다. 미대 교수직, 작업실 등 서울이 자신에게 허여한 자산을 모두 정리하고 고향 춘천으로 내려온 지 4년. 서울 집과 그림 판 돈 등 사재를 정리해 고향 춘천 땅에 2009년 설립한 '함섭 한지 스튜디오'는 그에게 많은 것을 선사했다. "춘천고 1년 선배인 전상국 작가가 부지 선정에 큰 도움을 줬지요."
한갓진 농촌이나 다름없는 춘천시 신동면 증리에 '함섭 한지 아트스튜디오'가 그래서 만들어졌다. 올해부터 본격 시작한 연작'고향(Once Hometown)'은 그의 새로운 푯대다. 3년째 고향에 살다 보니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그림 속에 고향이 떠오르더라 했다.
소양강 물줄기, 초가, 동구 밖, 황토 빛 구릉이 화폭에서 살아났다. 스스로 신기할 정도였다. "앞으로 나의 화면은 더욱 단순화될 겁니다." 그는 그것을 가리켜 "바탕이 이야기 하는 그림"이라고 말했다. 이를테면 불필요한 것들을 소거하고 단순화해 나가는 작업이다. 그것은 1996년 '신명' 시리즈에서 어렴풋이 감지되고 있었다. " 무속의 춤사위를 주조로 한민족의 심성에 내재한 흥을 표현하려 했죠. 붙여가며 두드리는 작업 과정에서 머릿속의 이미지가 소거되면서 춤사위를 드러내는 거였죠."
그의 작품은 노동과 시간의 누적물이다. 껍데기만 보여주는 사진으로 그의 작품을 이야기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아버님의 그림은 마무리 때, 한지 세 겹을 압착한 삼합지를 짓이겨 거기에 한지를 던져 붙이고, 손으로 주무르고, 솔로 두드려 압착시켜 완성하는 거죠." 누구보다. 가까이서 작업을 지켜봐 온 며느리 정보경(32)씨는 화강암의 물성(物性)을 바탕으로서 화폭에 구현한 박수근에 시아버지의 작업을 비겼다.
말마따나 함씨의 작품은 시간의 축적이다. 바탕은 그 결과물이다. 그의 인터넷 블로그에 기록된 경탄의 감정은 바탕 뒤에 숨은 이야기들의 독후감인 셈이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바탕이 내뿜어 주는 맛, 깊이 감. 바탕의 언어. 미니멀한(극소적인) 회화성을 지닌 바탕"에 대한 감상인 셈이다. 일반 한지가 아닌 닥종이를 찧고 두드려 손맛을 켜켜이 쌓아 완성되는 그의 바탕은 곧 시간의 축적이다.
시아버지는 한지, 며느리는 유화라는 극과 극의 소재를 쓰지만 이들은 닮아 있다.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재료의 속성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원초적인 유희성을 보여주려 한다. "저는 유화 물감을 짓누르고 이겨 발라감으로써 실현하는 물성이라면, 아버님은 한지를 던져가며 만드는 물성이죠."허상이 실재를 호도하는 사이버 문명은 여기 끼어들 틈이 없다. 그림을 일단 많이 그린다는 점에서도 두 사람은 일치한다. "판매나 전시 같은 문제는 추후의 것이에요. 그리는 행위 자체에서 기쁨을 얻으니까요." 그 스승에 그 제자일까.
이들은 함씨가 홍익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시절, 사제로 만났다. 회화과 석사과정의 그녀는 밝은 성격으로 맡기는 일을 척척 잘 해 내는 데다 영어도 잘 해 큰 일에는 제격이었다. 닥종이 같던 스승의 무심함이 오히려 그를 당겼다. 함섭 씨는"학생의 그림을 자기 아류로 만드는 게 교수"라는 독특한 지론의 소유자다, 그의 밑에서 화업을 닦은 제자들은 각각 독특한 일가가 됐다. 알루미늄 판에 색을 칠해 드릴로 긁고 깎는 극사실주의적 작가 한영욱, 캔버스에 얼음 덩어리를 그리고 그 속에 꽃잎이나 줄기 등을 그리는 박성민, 사실적 그림을 추상의 어법으로 재구성한 뒤 천 위에 그리는 김명숙(춘천미술협회 회장) 등이 그들이다.
정씨에게 함씨의 홍대 앞 작업실은 우선 점심을 해결하는 밥집이었고 다음 전시회 홍보 기획실이었다. 또 화업을 잇고 있는 아들 동훈씨를 알게 된 곳이기도 했다. 2011년 12월 결혼해 두 살 바기 아들을 둔 이들 역시 동지다. "남편과 작품은 사뭇 다르지만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라 서로 이해하는 데다, 둘 다 운동을 좋아해요." 여의도 일대를 자전거로 댓 시간 같이 돌고 주말이면 체력 소모가 큰 산악 자전거로 함께 했다. 그런데 대화 주제는 앙리 마티스의 색채학이나 서정적 추상 등이었다.
동훈 씨의 테마는 스포츠선수들이 보여주는 순간이다. 너무나 다른 세 사람. 특히 동훈씨는 인터뷰 당일 인천아시안게임과 관련된 일 때문에 춘천에 올 수 없었다. 아버지와 아내가 순수 예술의 진영이라면 그는 예술이 현재와 맺는 방식에 관심을 두고 있다. "내 그림은 일종의 스토리텔링이다."스포츠만이 줄 수 있는 진실의 순간을 화폭으로 옮긴 '감동전'등의 독특한 전시회는 내년 인천아시안게임에 맞춰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릴 '환희전'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기록으로서의 예술이라는 독특한 실험이다. 구상에서부터 선수들 인터뷰, 캔버스 작업 등 작품의 모든 제작 과정까지가 그에게는 예술이다. 그의 전시장은 복제된 대중 매체가 줄 수 없는 현장의 아우라를 보여줌으로써 왜 우리 시대에 예술이 의미를 갖는지를 입증하는 거대한 답안지다. 향후 뉴욕 전시회 앞두고 현지 답사 작업 등이 남아있다.
그의 예술은 실제 세계와 강력한 유대를 지닌다. 스포츠를 주제로 한 아들의 전시 때는 황영조 등 현역들도 와서 친분을 확인시켰다. "황영조 선수에게 마음을 두게 된 것은 일장기 가득하던 몬주익 언덕에서 일본 선수를 제치던 그 감동의 순간을 제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죠."인천아시안게임에서는 그 주제는 장애인 선수다. "관심의 뒷전으로 밀려난 장애인 스포츠를 알리고 싶은 거에요."기자가 춘천으로 찾아 간 날, 그 전시회와 관련된 급한 일이 생겼다.
"원래는 판화를 전공했어요. 매우 계획적이고 일을 세분하는 스타일이죠. 남편은 어떤 선수와 작업할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해요." 2009년 유명선수들의 일상을 주제로 한'열정전'에 이어 지난 1월 아산 병원에서 소아암 환자 돕기 '감동전'을 열었고,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과 관련해서는 장애인 체육을 주제로 한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손자 승우(2)와 함께 함씨는 고향에서 또 다른 꿈에 부풀어 있다. 전통 한지 생산의 대표 산지로 유명한 원주에 한지 테마파크를 세우겠다는 것. 내년 1월 방영을 목표로 추진중인 작업이 그 하나다. 그는 춘천 MBC, 중국 항저우 방송, 일본 후쿠이 방송이 합동으로 제작 중인'Paper Road'(가칭)에서 MC로 나선다. "닥나무를 원료로 쓰는 한국의 한지가 최고임을 부각시킬 겁니다." 제조 과정 등을 꼼꼼히 보여주면서 그가 강조할 말은 이렇다. "한지는 무궁무진하다. 새집 증후군에 특효약이다."
이 곳은 개방돼 있다. 현재 1층은 한지 체험관으로 이웃들을 반기지만 앞으로 80평 건물을 더 지어 전시공간으로 쓸 계획이다. "나, 아들, 며느리의 작품을 한 군데에 전시하는 거죠."그 작업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반 년 전, 그는 그 지겨움을 내쫓을 방도를 마련했다. 작업장 한 켠에 마련한 전통 큰 북 두 개. 적막한 춘천 교외에서 때로 들려오는 북소리는 오늘도 누군가 닥나무를 짓이기고 있다는 증거다.
춘천 = 장병욱 선임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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